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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증언
태영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8년 5월
평점 :
나는 태영호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크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우선 내가 보았던 탈북민(선생님의 책 속 표현을 따르자면 통일민)들은 이북 지역 특유의 거친 억양으로 말을 하는 반면에, 선생님께서는 이북 억양이긴 하지만 차분한 어투로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북한 엘리트로서의 신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내가 영어 교육을 우리 세대처럼 전문적으로 받을 수 없었던 우리 윗 세대 중 미국이나 영국 등 영미권 국가에 가서 활동한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한국어 억양이 묻어있는 영어이지만,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 구사력에 있어서 정말 빼어난 수준의 우리 윗 세대 특유의 영어에 매력을 느낀다. 예를 들자면 반기문이나 자니 윤과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여하튼, 태영호 선생님의 영어도 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는데, 북한에서 교육을 받으신(책을 읽어보니 두 차례의 중국 유학을 다녀오시긴 하였으나) 태영호 선생님께서도 발음은 한국 토종억양이 묻어있지만, 세계 외교 무대에서 당당히 통할 뛰어난 어휘력과 문장력을 가지신 영어를 갖고 계신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무튼 북한과 관련된 서적으로 올해 들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김정일을 수행한 러시아 정치인이 쓴 <동방특급열차>, 또 평양에서 김일성의 보호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아프리카 적도 기니 대통령의 딸이 쓴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라는 책을 읽었었다. 두 책의 저자 모두 남과 북 모두에 연이 있기도 하고, 아무래도 북한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이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 제3자 관찰자적인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실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인 태도보다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태도로 북한을 묘사했다. 나는 진짜 북한 사회의 구성원이었으면서, 북한 시스템의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이 직접 묘사한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혹시 태영호 선생님께서 쓰신 책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는데 역시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탈북하신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책을 썼을 리가 없었다. 황장엽 선생께서 쓰신 자서전은 절판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날로부터 거의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태영호 선생님께서 책을 출판하신다는 기사를 보았다. 정말 신기했다. 알라딘 미리보기로 책을 몇 쪽 읽어보니, 굉장히 흥미로워 예약 주문을 했는데, 얼마 뒤에 다른 책을 추가로 함께 구매하기 위해 주문을 취소하고 재주문하였다. 그 사이에 책의 인기가 폭등하여, 재주문한 책은 2쇄 출판본으로 받아보았다. 이런 기념비적인 책은 초판본을 소장하고 싶었는데, 굉장히 아쉬웠다.
책의 어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분한 어투의 태영호 선생님의 화법과 굉장히 닮아있다. 목격하신 진실과 경험 그리고 생각을 담담하고 논리정연한 문체로 서술해 나가셨는데, 이러한 문체와는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 내용은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아직도 철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어 장막 밖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북한 사회에 대한 생생한 묘사들이 있기 때문에, 북한 사회에 대해 궁금하지만 알 수 없었던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내용들이 많다. 북한 외교의 중심에 계셨던 분이기 때문에 외무성과 외국 공관에서의 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고,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였던 김정철 수행기와 같은 일화, 그리고 바티칸에 데려갈 천주교 신자 할머니와 같은 일화들은 흥미롭지만, 북한의 공포정치에 관한 일화들은 알면서도 충격적일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김정일은 대외적으로는 인권 문제를 면전에서 제기한 스웨덴 총리 앞에서도 유쾌하고 호방한 태도를 일관하며 세상 이치에 밝은 시늉을 하지만, 이는 잠시동안 세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기만전술에 불과하며 내부적으로는 핵개발에 집착하고 인권 유린을 지속해나간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동방특급열차>에서 러시아 정치인의 시선으로 묘사된 호쾌하고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하는 김정일의 모습과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억에 남는 대목은 북한 정권이 핵개발 작업을 어느 정도 완수하고 올해를 평화공세의 해로 상정해놓은 계획이 있었다는 점인데, 실제로 흘러가는 정세 또한 이와 비슷한 것 같아 기억에 남았다.
개인적으로 김씨 일가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요즘 세태에 대해서 굉장히 우려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실질적인 행정력이 닿지 않는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통일 정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북한 주민들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김씨 가문의 단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왕 북과 평화 정세를 가지기로 하였다면, 우리나라의 소프트파워를 북한으로 자연스럽게 유입시킬 수 있는 루트 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다른 나라 언어들로도 널리 번역된다면, 분명히 여러 나라의 독자들로부터 읽힐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