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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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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작가의 소설에는 이상한 따뜻함이 있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일종의 긴장감 같은 게 유지되는데, 그 긴장감은 『안락』에서나 이 작품에서나 관계, 타인에 대한 관심을 통해 유지된다. 마치 작가가 극적인 장치, 묘사 혹은 누군가 해하는 표현 없이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증명이라도 해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안락』에서는 할머니의 죽음, 이 소설에서는 해미의 연락두절과 같은 긴장감 유지 장치 같은 게 있지만, 그 장치는 소모되거나 파국으로 끝나는 법이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아가게 하고 최소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로서만 기능해서, 이야기의 따뜻함을 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따뜻함이라는 건 굉장히 모호해서, 자칫하면 신파, 혐오, 연민 등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은모든의 시선은 그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경진의 태도와 행동이 연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하게 자꾸 별로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경진에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데, 경진은 '이 사람은 또 왜 이러지' 하면서 항상, 결국 그 말들을 끝까지 듣는다. 경진은 판단하지 않고 기다리고, 질문한다. 경진이 자신의 말을 앞세우고 기다려주지 않는 딱 한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인 해미인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해미에게도 '짐작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정세랑 작가 표현처럼) '고요한 집중력으로 듣는 행위'에 대한... 깊으면서도 편안한 경험이다.

세신사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딱 두 종류뿐이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계집애가 해 지고 나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거나 문지방에 앉지 말라거나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 말처럼 뭔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머지는 큰언니를 도와서 동생들 저녁을 먹이라거나 숙제를 마쳤으면 앉아서 마늘을 까라거나 하는 뭔가를 해 놓으라는 말들, 다시 말해 "네"라고 대답하면 그걸로 끝인 말들뿐이었다. (...) 다만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는 다른 성장기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틈날 때마다 최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려 애썼다고 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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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광주 걸어본다 9
김형중 지음 / 난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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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면, 편집자가 김형중 평론가에게 광주에 대한 에세이를 맡긴 것은 정말좋은 결정이야, 한 번 밖에 없을 '걸어본다 시리즈 광주편'을 김형중 평론가가 쓴 것은 정말 다행이야, 라는 생각이 든다.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5.18을 간접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광주를 경험한 듯 했다. 시리즈 이름이 '걸어본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독자가 가장 기대하는 바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 마치 내가 그 공간을 걷고 있는 듯한 체험의 느낌일 것이다.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넘어서, 내가 직접 걸어도 이런 체험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자주 생각했다.

광주의 보이는 모습보다는, 광주의 어떤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자의 문화적 깊이가 조금씩 드러나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인 에세이다. 나에게는 '문화'라는 단어를 제대로 말하기 위한 일종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문화가 아니라 산업인 이유는 그것이 소모하기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시와 소설이 문화인 것은 그것이 아무런 이윤도 창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66

그에게 문화란 아무래도 그 태생부터 잉여적인 어떤 것이었다. 문화란 필요적 소비를 제외한 잉여적 소비 행위에서 시작한다. 아무런 대가나 재생산에 대한 기대 없이, 내가 가진 자산과 시간과 에너지의 일부를 사유와 아름다움을 위해 기꺼이 탕진할 때만 진정한 문화는 탄생한다. - P71

양림동은 낙후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몇 년 전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광주의 명소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는 향수와 가난도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 P86

애도가 끝난 사건만이 기념될 수 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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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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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처럼 속에 담긴 글도 매력적이다. 어떤 문장을, 문단을, 토막글을 골라도 모두 매력적이다. 어떤 말이든 허투루 쓰이는 말이 없고, 있는 말들은 모두 정확한 위치에 있다. 정확하고, 웃기고, 무해하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일까? 하고 생각했다. 마치 주인공을 작가 자신으로 설정한, 술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읽은 느낌이다. 특히 술을 매개로 파트너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정말 생생하고 재밌었다. 넓지 않은 방에서 냉장고를 등받이 삼아 앉아 있는 작가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 아, 나도 이런 사랑과 말장난이 가득한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어도 이런 글을 하나쯤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


https://www.instagram.com/p/CH4wONXhipR/?igshid=1qlpdefjjwhzf

그 시기에는 모두가 암담했다. 모든 게 술처럼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 P117

여자가 밥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걸 두고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 건, 그 행동에 무릅쓴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술 마시는 남자를 두고 멋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건 멋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는 건데. - P153

평소 좋아하던 술이라도 강요가 섞이는 순간 술은 변질되어버린다. 폭탄주로 봐야 할지 칵테일로 봐야 할지 애매한 경계에 있는 ‘소맥‘의 경우, 나에게 있어 분류의 기준은 ‘마시는 사람의 마음‘이다. 같은 소맥이라도 누군가 말아서 마시기를 강요하면 폭탄주지만, 내가 마시고 싶을 때 누군가 말아주면 칵테일이 된다. - P165

백지 위에서 쓱쓱쓱 같이 뒹굴며 같이 뭉툭해지며 같이 허술해져가며 마음이 열리고 말이 열리는 건 일부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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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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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들을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지겨운 이야기지만 박지후 배우, 김새벽 배우의 너무 좋은 연기가 다시 떠올랐다. 다시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느낌이었다.


* 오빠, 언니, 담임 선생님 할 것 없이 누군가 자꾸 은희를 때린다. 오빠는 은희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언니는 뛰어갔다는 이유로, 담임은 '김은희 사랑해'라는 글자가 쓰여졌다는 이유로 은희를 때렸다. 은희는 사랑을 했을 뿐,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지만 계속 상처를 받는다.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는 걸 은희는 이미 알고 있다. 물론 모든 경험에서 뭔가 배울 수 있지만, 할 필요가 없는 경험도 있다.


https://www.instagram.com/p/CH4cxyCBowE/?igshid=yzdenvpqyg25

영지 "너 이제부터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같이 맞서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알았지? 약속해." - P156

은희 "시간 제대로 알려 주셨어야 했어요. 그럼, 볼 수 있었단 말이에요. 영지 선생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 P169

누군가의 시선으로, 공감으로 고통은 고통이 된다. (...) 여성의 고통을 고통이라고 언어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최은영) - P210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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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박민정 후기 / 플레이타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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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작가들의 자전적 글이 한국 작가의 자전적 글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자전적 소설『나 아닌 다른 삶』도 그랬고, 이 책도 그렇다. 그런 글은 마치 한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일본의 혼네, 한국의 눈치...같은 단어가 생각난다.

* 어떤 남성 친구를 만나면, 인생의 최종 목표가 '화목한 가정을 꾸린 가장'인 것 같아서...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남성권력의 재생산이 인생의 목표이자 끝인 것 같은 사람들. 그런 모습이 싫다는 건, 사실 내가 가진 그런 부분에 대한 혐오이기도 할 거다. 이 책을 읽다가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네...


https://www.instagram.com/p/CH4TtfmBBwd/?igshid=yqbe4d3ywxuk

세상은 어머니보다 이 망상을 더 사랑했다. (...) 21세기의 ‘신가부장제‘는 우리에게 수동적이되 야심 찰 것을, 모성적이되 성적 활력이 넘칠 것을, 자기희생적이되 충족을 알 것을 요구했다. 즉 경제와 가정 영역에서 두루두루 멸시받으며 사는 와중에도 우리는 ‘강인한 현대 여성‘이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만사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게 일상사였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P25

초월적인 것이란 ‘너머‘를 뜻했고 내가 만일 ‘너머‘를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게 정확히 무얼 의미하든 간에, 그럼 난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라빈처럼 나도 사랑에 물린 기분이었다. - P93

멀리사는 내게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멀리사가 내게 외치고 있는 말들이 소리 내어 말하기와 관련돼 있으며, 내가 바라는 바를 솔직히 인정하라는, 세상에 굴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올곧이 살아가라는 호소와 관련돼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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