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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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유독 역사책을 많이 읽었고, 고등학생 시절 양이 많아서 남들이 꺼리는 3역사(국사, 근현대사, 세계사)의 조합으로 수능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암울한 역사에 점점 흥미를 잃어버렸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환골탈태한 일본과 비교를 하면서(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왜 우리는 일본처럼 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다양한 독서와 일본사 공부를 통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닌, 그 기반이 오랜 기간 착실히 쌓이다가 페리 제독의 방문이라는 기폭제를 만나 폭발한 것임을 알기에 더 이상 조선과 단순 비교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이 내공을 착실히 쌓는 동안 조선은 정체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 책은 경제학의 제도학파 관점에서 그것을 분석한다.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추측하고 인지하던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 책은 조선 사회를 다방면으로 ‘제도‘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제도는 공식적 제도와 비공식적 제도로 분류되는데, 저자는 조선이 관습, 문화 등으로 대표되는 비공식적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공식적인 제도보다도 훨씬 더 조선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조선이 처음부터 극도로 교조화된 성리학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지배층이었던 훈구파 대신들은 부국강병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국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조선은 극도로 보수화된 성리학 중심의 사회가 된다. 이들은 도덕정치,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법치나 부국강병의 도모를 패도의 정치이며, 덕이 부족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에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림 세력은 지방의 향촌 사회를 지배하였으며, 원래 양반들만 따르면 되었던 자치규약인 향약을 양민에게도 지킬 것을 강요했다. 양민이 지켜야 하던 향약은 철저히 계급주의적이었으며, 양반계층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들로 점철되었다. 가령 우리가 농촌 공동체의 미덕으로 알고있는 ‘두레’도 양반들이 상민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규약이었다.

이쯤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조선은 총론만 강하고 각론이 약한 사회였다. 즉 ‘무엇을‘은 있는데 ‘어떻게‘가 없었다. 왕조 시작부터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지배층이 성리학이라는 단일 사상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책의 디테일이나 실무가 매우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부국강병의 가치를 포기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으로 백성 뿐만 아니라 관료, 정부까지 가난하였다. 이러한 결과, 관료와 지방의 하급 관리인 향리, 향촌 사회의 재지사족의 비리와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엄청나게 심하였다. 전체 파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이니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였고,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관료들은 비리의 유혹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착취 사회였다. 특히 향리들과 재지사족들의 폐단이 심했는데, 대동법 시행 전의 방납의 폐단이라던가, 세도 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정)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착취 시스템은 중앙 정부에서 지방 수령으로, 지방 수령에서 양민들로 단계별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조선 사회가 성리학에 매몰되어 파이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호혜와 재분배‘ 시스템에만 몰두하였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국가나 국민이나 가난을 면치 못하였는데,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일 수 있었다.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정치 안정을 위해서는 필히 분배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이 조선의 높은 평등의식을 잘 보여준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패하고 백성은 배 곯아도 왕조의 정권 연장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안정적이었으니 성공한 국가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언젠가 모 교수가 나와서 전세계에서 500년 유지된 왕조가 없다며 조선 왕조를 극찬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웃음만 나올 뿐이다.

조선 시대도, 일제강점기도 아픈 역사이지만 엄연한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나는 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나라가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관습과 문화라는 비공식적 제도는 그 수명이 끈질겨서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엔 대한민국 시민이 있고, 조선인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유연한 사상을 갖추고 적응력을 길러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아직도 조선인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조선인들이 정치권 같은, 국가를 움직이는 곳에 포진해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주류 정치권을 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조선 사림의 환생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이 옳다는 독선에, 명분을 내세우지만 위선적으로 뒤에서 구린 짓은 다하고, 돈 뿌려서 환심 사고, 노노재팬 같은 철지난 반일몰이에... 그냥 조선 시대 사림 내지, 향촌 재지사족의 환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부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조선 후기 같은 결말로 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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