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숲속에는 축복이>, 양수빈
이 소설이 가장 당차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러는 한편으로 경악스러웠다. 안아키 부모가 나오질 않나 의처증 부모가 나오질 않나 예정이와 예주에게 서로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예정이는 숲속의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건강한 아이(뇌수막염에 걸려서 결국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 살아났고 청각을 잃은 예정과는 다른)를 낳고 오겠다는 잉꼬 부부 부모님 때문에 열다섯 살 때 이혼한 외삼촌 집에 맡겨지게 되고, 그래서 사촌 언니 예정과 한 방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사춘기 소녀가 안아키 남녀가 몇 달 간 머물기로 한 숲속으로 향해 겪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다. 이 소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근간을 구축한 이성애 섹슈얼리티 신화의 모순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다시 한번, 인간이 싫어졌다... 그러면서도 예주 같은 친구 한명 사귀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다. 트위터 인류애 상실되는 이상한 짤 올라오는 계정 같은 거 자주 찾아보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그 인류애 상실 모먼트를, 양수빈 작가는 아주 총명하고 반짝반짝하고 날카롭고 재미있게 잘 집어내서 한 편의 멋진 이야기를 써냈다. 이 소설 읽고 뇌를 좀 회복시키길 바란다.
5. <친구를 데리고>, 윤단
세 여자의 하루를 그린 이야기다. 화자 '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 채영과 고등학교 학원 국어 선생님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 하루를 보낸다. 채영은 공장 기숙사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힘들어 했었고 죽고 싶다고 징징 거려 '나'를 한동안 힘들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가 흠모했던 학원 국어 선생님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말을 해주는 선생님이었지만 그러는 한편으로 학원 남학생과 연애를 해서 논란이 불거진 인물이다. (자꾸 '잘 가게' 짤이 떠올라 이 선생님한테 정 붙이기가 힘들었다. 인터넷 많이 하는 내 죄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 청렴결백한 인물은 아니다. 채영에게 모진 말을 하고 연을 끊었다가 자기가 정작 돌봄이 절실해지니 다시 채영과 연을 이어나가기도 했고, 연애 사건 후에도 선생님과 연락하며 20대까지 왔지만 정작 그 사건에 대해 목소리 높이며 소문 내고 다녔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참 복잡하죠? 윤단 작가는 이 세 인물에게 그 어떤 윤리적 잣대도 들이밀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이 세 인물이 흠뻑 취한 밤 서로 끌어안는 장면으로, 윤리적 잣대보다도 중요한 무언가를 그려낸다. 덧붙여, 씬 스틸러 거북이인 밤이 참 귀여웠던 것 같다.
6. <미식 생활>, 이서수
역시, 이서수! 라는 말이 나오는 소설이었다. '한국의 식(食)의 역사'를 나라라는 한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 청년의 일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나라의 성장을 보여줌으로써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의 역사와 한 개인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어낸다. 구조적으로 참 잘 짜인 소설인데 이걸 뭐라 설명하기엔 필력이 후달린다. 뼈말라, 먹방 유튜버, 삼대에 걸친 세 여성 이야기, 저출생 현상 등등... 많은 것이 잘 섞여서 한 편의 소설이 되어 있다.
... 전날 나라의 엄마는 낮잠을 자는 나라를 깨우더니 셔츠를 걷어 올리고 온몸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나라는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의 열기를 느끼며 그 사랑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임을 자신했다. (185p)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줄을 쳐둔 장면이다. 나는 주말이 되기만을 기다려 먹방 유튜버 알깨기가 소개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나라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알코올 중독자 친구 호린 쪽에 가까운 사람이고, 한때 나라가 맛집 뽀개기 하다 우연히 만난 뼈말라 미라 씨와 같은 입장이었던 사람인데, 그래서 맛집 탐방 열심히 다니는 나라가 좀 신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나는 먹을 때가 되면 꼭꼭 씹어 맛을 즐기며 먹기보다는 그냥 빨리 해치우자는 식으로 먹는 경우가 많아서, 좀 반성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먹는 행위는 정말 어렵다...
마지막에 수록된 전승민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꼭 읽어보기를 권장드린다. 모쪼록 젊고 혈기왕성한 여섯 편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