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연습한 시간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신유진 지음 / 오후의소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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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연습한 시간>에는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엄마로부터,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영향 받은 귀한 것, 대체될 수 없고 환산할 수 없는 인생의 값진 것 그러나 아주 모호한 것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작가님에게 글쓰기의 토대가 됐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엔 작가님이 엄마의 우산 아래 있다가 엄마의 우산 밖으로 나갔다가, 이제는 나란히 손잡고는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려졌다. 작가님이 엄마를 이해하면서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 내게는 타인을 이해하고 돌보면서 함께 가는 방법을 찾는 길로 들렸다.

 

나의 근원, 엄마와 내가 여성으로서 통과한 삶, 그리고 타자였다. 내게 가장 가깝고 그래서 늘 멀어지는 엄마라는 타자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확인하는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함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내 존재의 빈칸을 타인의 이야기, 그 안에 담긴 믿음으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가 타자의 그리움에 대한 응답이라면, 나는 타자의 믿음으로 온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누군가의 그리움과 슬픔을 기쁨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도, 내 삶도, 내 글도 존재해야 할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이 사소하고 하찮고 때로는 외면해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차곡차곡 이야기로 길어 올려 펼쳐준 것이 좋았다. 아름답지 않고, 의미 없고, 별 게 아니라 생각한 것, 외로워 침묵해버린 것들을 건져 살게 해준 이야기들이 무척 좋았다.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을 수도 있었을 내밀한 영역을 솔직하게 고백해준 덕분에 읽는 동안 슬픔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와르르 무너져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얻었다. 또한 드러내면 안 되는 줄로만 알았던 비밀, 욕망이나 갈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표출할 때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힌트를 얻었다.

 

슬픈 존재가 슬픔이 새겨진 것들을 만나 한 번 더 슬픔과 마주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내게 슬픔이 새겨진 것들을 여름의 텅 빈 거리, 혼자 빈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엄마의 책. 책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슬픔을 찾아내는 일이 슬픔을 떠나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주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슬픔과 비참함이 다르다는 것도.”

 

나는 비밀을 글로 쓴다. 글로 쓰인 비밀은 말로 전하는 비밀과 다르다. 비밀의 일부를 골라 다듬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비밀의 전부가 필요하진 않다. 비밀을 다룰 용기, 그거면 된다. 쓰는 나와 읽는 당신 사이에는 비밀의 내용보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의 나약한 모습을 본 순간,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무너진다는 사실과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직하며 살게 된다는 것, 그 진실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하다.”

 

세상에 나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글쓰기가 내가 손에 쥔 돌멩이 하나라면, 나는 그 돌을 어디에 둘 수 있는가? 무엇을 짓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 겸손함을 가장한 거대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당한 돈이라는 표현만큼 애매모호한 말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들키고 싶지 않아 감춰둔 어두운 감정들, 이를테면 불안, 우울,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외면하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서 있는 곳이 또 너머의 세계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작가의 언어 앞에서 경이를 느끼는 동시에 내 언어의 결여를 깨닫고 절망한다. 나에게는 없음있음으로 바꿔놓는 통찰력과 과감히 땅 위로 날아오르는 용기 같은 것이 없다. 내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결여에서 오는 욕망뿐이다


욕망이 없는 글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욕망이 빠진 글을 만나본 적이 없다. 세계를 즉시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심지어 덜어내려는 마음조차도 욕망이다. 이 욕망들이 없는 세상은 무음의 세계다


나는 내 욕망을, 말하고 싶은 이 충동을 침묵의 무덤에 묻을 수 없다.”

 

삶은 사이에 있을 수 있으니까. 작가님의 표현을 잠시 빌린다면 꿈의 매끈한 포장지와 현실의 뾰족한 가시를 거두고 틈을 파고들면, 거기에 내가 찾는 게있을 수 있으니까. 틈을 내고, 균열을 만들고 싶어진다.


단단함이 아름다울 수 있구나.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구나

침묵과 외로움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욕망하다 주저앉고 다시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마음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그 사랑은 끝없이 살아가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나는 <사랑을 연습한 시간>을 이렇게 읽었다.


*도서는 출판사의 제공을 받아 작성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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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 나를 잃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심리 안내서
휘프 바위선 지음, 장혜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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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막막할 것이다. 우울증은 실체도 없이 엄청난 전파력을 가져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일상까지 천천히 파괴하게 될 것이다. 우울증은 나와 상관 없다고? "자신이나 가족 혹은 친구가 평생 한 번도 우울증을 앓지 않을 확률은 거의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하다"는 저자 서문처럼, 우울증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이 책은 우울증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친구나 가족이 평소와 이유 없이 다를 때, 예민하게 인지하기 위해서. 울적하고 가라앉는 마음, 의욕이 없고 좋은 일이 없다는 느낌, 쓸모 없는 인간인 것 같거나 죄책감이 드는 기분, 불안하고 무서운 기분,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 같은 것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수 있음에도, 무시하고 외면하기 쉬운 증상들인 이유다.


그때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질병의 회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연락을 취할 것,상냥한 질문을 건넬 것을 안내한다. 특히 부적절한 표현과 권하고 싶은 표현의 다양한 예시를 제시해줘 스스로 되짚어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만약 어떤 상황이 생기게 됐을 때 병원이나 전문가를 찾지 않더라도 먼저 해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완치한 환자의 절반이 재발을 겪는다고 한다. "두 번 우울을 겪은 사람은 재발 가능성이 70퍼센트이며, 세 번 경험한 환자는 재발 위험이 80퍼센트에 이른다"고. 우울증의 신호를 빠르게 인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우울증 치료 방법에 관한 부분 중에서


생각을 억누를 수는 없어도 생각을 믿지 않을 수 있다. 마음 챙김을 한마디로 요약한 핵심 주장이다. 이 방법의 목표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마음 챙김의 한 가지 출발점은 우울증을 부정하지 말고 우울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 현실에 맞설 수 있다.


효과적이고 빠른 우울증 치료법은 바로 운동이다. 일주일에 최소 세 번,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최보 30분씩 파워 워킹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면 경중증 우울증까지도 항우울제 복용에 버금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나까지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1. 환자가 아닌, 나부터 제대로 챙길 것

('산소 마스크'는 당신이 먼저 써라)

2. 환자와 적당한 거리를 둘 것

3. 상대가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마라

4. 매일 시간을 내서 즐거운 일을 하라

5. 너무 야단치지 마라


"매일 조금씩 읽어 나가라고 권하고 싶다. 한꺼번에 스스륵 읽고 나면 당신의 기분도 따라 우울해질지 모르니까." 라는 저자의 친절한 당부처럼 이 책은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 혹은 미래를 위해 알아야 할 안내서가 아닐까 싶다.


* 을유문화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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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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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글이 소설이라 명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괴로웠다’는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폴링인폴>을 읽었다.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특별히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쉽게 읽혔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빠르게 읽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확하게 읽는 데는 분명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이다. 9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발견해내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찾고 싶었고, 나름의 방식으로 명명하고 싶었다.

 

‘감자의 실종’으로 시작돼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끝나는 9편의 소설에는 각기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에는 저마다의 시간과 계절이 있고, 갈등과 고민이 존재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한국이 주 무대이기는 하나, 때로 미국과 독일 또는 프랑스에서도 이야기라 펼쳐진다. 그리고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삶의 모습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상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상투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한,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어쩌면 그렇게 상투적이었을까. 한두 문장으로 요약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 (‘거짓말 연습’, p190)

 

신춘문예 당선작 ‘거짓말 연습’은 남편의 외도로 평온했던 결혼생활이라는 단꿈이 깨져버린 주인공 ‘나’가 예정에 없던 프랑스 유학을 오면서 겪게 되는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돼 고요함이 절실했던 ‘나’에게 어찌 보면 유학은 당연하고도 예상 가능한 선택이었다. 떠나왔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제대로 정착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주소를 적어 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잠시 머무는 거처인데다, 언제 다시 만날 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나’는 어학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솔직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목적은 진실보다는 스킬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다채로운 거짓 상상이 언어적 소통에는 득이 됐다.

 

“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래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거짓말 연습’, p182)

 

한국에서 온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잠시 머무르다 곧 떠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도 주인공 ‘나’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방식이었는지도.”(‘거짓말 연습’, p196)

 

‘거짓말 연습’의 주인공 ‘나’가 결혼과 이혼, 한국과 프랑스, 진실과 거짓, 현재와 미래의 모호한 경계에서 ‘거짓말’로 삶을 지탱한 반면, ‘밤의 수족관’편의 주인공 ‘나’는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자신만의 진실을 지켜내려다 그만 삶을 잃어버린다. 스타와의 사랑, 그것은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진실이었다. 그것을 선택하고, 지키기 위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포기하고, 단념하고, 당연하게 감수해야 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의 사랑을 홀로 독차지한다는 것은 날카로운 칼날을 몰래 삼키는 것과도 같지. 아무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섬뜩한 고통이 가끔씩 내 안을 찢기라도 하듯, 훑으며 지나가. 당신을 내 사람이라 말할 수 없고, 내가 당신의 사랑이라 밝힐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 고통. 당신이 우리의 결혼 사실조차 비밀로 하고 싶다 했을 때, 나는 그것마저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어. 스타의 뒤에서 사는 그림자 같은 삶. 역사 속 유명한 스타를 사랑한 여자들은 모두들 숙명처럼 그런 삶을 짊어지고 살아갔잖아. 당신은 언제나 때가 되면 우리의 결혼의 결혼사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당신. 그때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밤의 수족관’, p132)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이라는데, 그리고 가끔은 그 ‘사랑’이란 것이 누군가에게 말하면서 더욱 선명해지고, 커지기도 하는 법인데. 아무리 ‘사랑’이 둘만의 은밀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그것이 정말 ‘사랑’일 수 있을까. 때문에 만인의 스타이자 동시에 나만의 유일한 남자인 그의 아이를 잃어버리고, 확신했던 자신의 사랑마저도 잃어버리는 주인공 ‘나’를 보면서,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그녀의 삐뚤어진 집착과 오해가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자 같은 삶을 살면서도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 그녀가 애처롭고 가엾게 느껴졌다. 전후맥락과 자초지종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나가는 다람쥐에게조차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사랑이었다”고 말한 여배우도 떠올랐다. 삶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면, 그 말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철저하게 지켜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도 증명될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 철저하게 고립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주인공 ‘나’가 아이를 놓아버린 건지, 정신을 놓아버린 건지 모를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그렇기에 너무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나는 정말 묻고 싶었어. 도대체, 실체란 것은 무엇이야?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봐. 그때, A라는 사람은 오로지 B라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B라는 사람이 A라는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듯이. 그것은 당연한 거지.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그래, 어떤 영화에서처럼, B에 대한 A의 기억을 다 지워버리면, 그러면 B는 A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눈을 감으면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듯이 말이야.”('밤의 수족관‘, p136)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건 ‘폴링인폴’의 주인공 ‘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자아이를 짝사랑하게 되는 그녀는 그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앞서는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 ‘그렇지, 넌 미국을 선택하지 않았지. 나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생각은 자꾸만 한쪽으로 흘렀다.’

 

폴의 부족한 어휘력과 부정확한 발음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뿐이라고 생각해보아도, 그것으로 폴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녀는 안다. 폴이 한국에 온 목적은 한국인 누군가와, 혹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까닭이다.

 

“나는 결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communicat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내가 벗어던지려 해도 절대, 절대 벗을 수 없는 내 피부색의 역사를 말이에요.”(‘폴링인폴’, p80)

 

그 순간, 그녀는 폴을 잃고 있음을 실감했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가장 절실한 사연이 타인 앞에서는 한없이 진부해지는’ 것이 삶이고, 또한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지속되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녀 자신이 폴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들은 유일한 상대였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수많은 문장들에 밑줄 긋던 나는 ‘자전거 도둑’과 ‘감자의 실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아홉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나름의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존재’와 ‘이해’라고 보았다. 진부하고, 평범한 개인적 삶이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언어에 의해 삶이 규정되는 한, 이해받기 위해서는 일단 오해하더라도 말해야만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작가는 소설마다 끊임없이 존재와 이해를 언급하고 있었다.

 

“당신도 들었지? 물고기들은 기억력이 삼 초밖에 안 된다잖아. 아닌가? 금붕어만 그런 거던가? 갑자기 헷갈리네. 어쨌든 기억력이 단 삼 초뿐인 생명체의 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궁금해져. 삼초 후면 소멸될 것이 자명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은 훨씬 수월해질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행복과 짜릿함이 삼 초 후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 은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릴지도. 분명한 것은 기억이 오직 삼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생명에게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거야. 그렇지? 결국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마저도. 그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해 지속될 수 있는 것일 테니까.”(‘밤의 수족관’, p121)

 

“그녀는 술에 취해 하천으로 뛰어드는 사람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비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까.”(‘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 p114)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너무 잘 알았다.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손 벌리기 민망할 때, 우리는 서로의 주머니를 털었다. 세상으로부터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뿌리를 내렸다. 어둠을 움켜쥐고 자라는 음지식물처럼. ‘우리’라는 견고한 껍질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안전했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었고 모든 것은 공유되었다. 가족보다도 가깝고 서로를 분신처럼 아꼈던 우리. 우리의 공동생활은 삼 년 팔 개월 동안 아무 탈 없이 지속되었다.”('자전거 도둑‘, p36)

 

“문득, 아무에게도 호명되지 않는 내 이름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아, 안나. 너는 왜 이렇게 빛나는 것일까.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불현듯, 이 모든 것이 그놈의 자전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다시 미쳤다. 자전거. 자전거만 안나에게서 빼앗아버린다면. 그렇게만 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부당한 억울함도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았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자전거 도둑’, p53)

 

언어가 사고의 집이듯 이해받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언어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비언어, 즉 태도와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잊었던 그것을, 나는 너무도 직접적으로 박힌 한 문장 덕분에 오래도록 상기시킬 수 있었다.

 

“행복이 마취제와 같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행복에 겨운 사람은 타인의 불행 앞에서 무례해지는 법이었다.”(‘자전거 도둑’,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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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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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민박집을 운영했던 대리님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여행카페에 인기 민박집으로 회자될 만큼 운영을 잘했고, 수익도 짭짤했다면서 부모님이 돌아오라기에 한국에 오긴 했지만 곧 다시 갈 계획이랬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년 추석 연휴에는 에티오피아 항공이 프로모션으로 싸게 판 항공권으로 아프리카도 다녀왔다. 출국 당일까지도 같이 야근을 했던 나는 질릴 정도로 많은 얼룩말을 봐서 나중엔 텐트 옆을 지나다니는 치타와 사자, 기린을 곁에 두고도 잠을 잤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자체를 좀체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내가 그녀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행’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 이후로는 대리님도, 나도 ‘떠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버릇처럼 달고 살았으나 그 말을 진짜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믿게 됐다. 그녀가 한국에 오는 카우치 서퍼들을 위해 남대문 근처에 옥탑방을 얻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부터 말이다.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말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녀는 다음 달 프라하로 떠난다. 나는 그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사람은 행동에 옮기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 둘로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를 읽는 내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데는 민영처럼 카우치 서퍼인 대리님과 주인공 나처럼 작가가 되려고 고군분투하거나 이미 작가인 친구와 선배가 있었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감의 폭이 컸던 것은 나 또한 주인공들처럼 불확실한 20대라는 터널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거다.


캠퍼스의 서울 이전과 방학으로 휑해진 지방의 자취방을 ‘고아의 도시’라 부르면서 예정에 없던 동거를 시작하게 된 세 명의 20대. 이들에게는 ‘고아’가 되기까지 각자의 사연이 있다. 민영처럼 입양이 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를 알 수 없거나 나와 요조처럼 가정사로 인해 혹은 본인의 의지 때문에 자발적으로 부모를 저버리게 된 것. 자신의 역사이자 뿌리이기도 한 가족 대신 셋만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의 삶에 대한 적당한 관심은 혈육을 대체하는 공동체로서의 유대와 결속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혈육이 아니기에 그 관심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나, 요조 그리고 민영, 이 셋의 일상은 분주하긴 하나, 제목처럼 어딘가 한곳에 닿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한심한’ 20대로 치부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일류 경영대를 졸업하고도 음악이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예술대학 늦깎이 신입생이 된 요조와 글을 쓰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상 글쓰기에만 매진할 수 없어 밤낮이 바뀐 채 알바를 하는 나, 그리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민영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당사자는 나날이 힘들기만 하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제3자가 보기에 그들의 삶에는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없다고 평할지 모른다.


그런데 목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보편타당한 20대의 삶이 아닐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게 되는 꿈과 목표는 자라는 동안 더욱 구체화될 수도 있겠지만 바뀔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몰두와 몰입이 더 넓어져야 할 세계관과 시야를 가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국영수를 잘해 명문대에 진학하고,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만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린 지 오래인 이 사회에서,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삶은 배척당하거나 멸시되는 것이 풍토인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꿈만 좇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의 삶은 표류할 수밖에 없고, 또 표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고아의 도시’에서 끝까지 남아 있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기에. 우리의 일상이 늘 드라마틱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듯,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희미해 보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도리어 이러한 불확실성에서도 끝까지 꿈과 끈, 개인적 바람을 잊지 않는 셋의 행동에서 동시대의 20대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얻지 않을까.


인생의 모든 성공을 20대에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20대의 끝자락에 와서도 바라왔던 성공의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20대를 지나고 앞자리가 바뀌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보니 20대에 꿈꿔왔던 성공이 온전히 나의 마음속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경쟁하면서 투영된 것임을 알게 됐다. 또, ‘체력과 정신력이 행복하게 만나는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라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는 것을 여전히 막연하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이 깨닫게 됐다. 그러기 위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는 비판과 가벼운 에피소드식 나열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작가가 바로 20대, 그 나이를 살고 있어서다. 동시대 또래의 현실을 이 정도로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에 공감할 줄 아는 작가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선 또한 깊어지지 않을까. 적어도 누군가를 위해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니.


“나는 어리고 나는 뭘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고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만 한 가지씩 비밀을 알게 된다”고 말한 작가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나는 뭘 모른다는 이 스물넷 신인작가가 그럼에도, 분명한 무언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용히 다음 작품을 기다리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p41

우리가 하루종일 붙어지내던 지난 겨울방학에 이곳을 ‘고아의 도시’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요조였어.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나와는 상황이 달랐지. 요조의 말대로 그는 ‘자발적 고아’였으니까. 부모님과 연락을 하지 않을 뿐, 그는 여동생을 통해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눈치였어. 우리가 그때 그런 식으로 만들었던 둘만의 언어는 이제 더위에 다 녹고 없었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자 온통 깜깜한 내 동굴이 완성되었지. 나는 내뱉은 축축한 숨을 다시 들이쉬면서 눈을 감았어. 민영은 그 도시의 어느 카페에서 와이파이를 빌려 메시지를 보냈을 테지.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라서 배낭여행자들에겐 카오스로 불린다는 그 도시를 상상했어.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냄새가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와, 어딘가 높은 음으로 삐죽거리는 더운 나라의 말투,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도로를 빽빽하게 메운 삼륜차와 택시들의 소음이 순서대로 떠올랐지. 그것들이 내 잠 속으로 따라왔어.


p51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온 한국이 내가 ‘카우치’를 찾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거. 결국엔 여행 때 만났던 친구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미국인을 소개시켜줘서 걔네 방에서 잤지만 말이야. 거기였는데 무지무지 작은 방이었지.


p53

-나는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민영은 내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박또박 말했어. 그애는 진심을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사용할 줄 알았지. 그럴 때면 의심이 많은 나 역시도 그애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어. 동갑내기 민영을 세 살 언니로 만들어서 소설을 쓴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p54

사 년이나 여행을 다닌 민영에게는 헤어지는 게 아주 익숙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지. 수없이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냈을 테니까. 나는 담담하려고 애썼지.


나는 한국에 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오빠가 있는 D시에 가봐야 할지, 아니면 학교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됐어. 비행기 티켓을 찢어버리고 민영처럼 어디로든 떠날 자신도 없었어. 그런 복잡한 마음들 때문에 나는 그애에게 아쉬운 마음을 완전히 전할 수가 없었지.


p82

-정착하려고?
요조가 물었어.


- 그 단어는 좀 거창하게 들린다. 그냥 이제 여행 다니는 게 좀 지겨워졌어.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어딘가에 익숙해진 다음 다시 떠나는 게. 평생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다시 한동안 정적이 흘렀어. 나는 왜 민영이 한국에서 지내보겠다고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나쁜 파장을 일으키는 건지 알기 힘들었지. 그 주제넘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곰곰이 생각했어.


p85
-그래. 민영. 돈을 벌어버려. 그리고 소파를 사서 카우치 서퍼들에게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자.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소파를 살 거야. 초록색으로.


p92

제대로 살고 있나. 제대로 산다는 건 뭘까. 아르바이트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글쓰기 같은 건 하루라도 일찍 때려치우고 토익학원에라도 다녀야 하는 것인가. 일 년이라도 어릴 때 재수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일단 토익과 대학생 모두가 갖고 있다는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시험부터 시작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살아서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오빠 눈치를 보지 말고 아빠의 손을 잡았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초등학교 시절 논술학원 대신 오빠와 함께 단과학원에 다녔다면 책 같은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거고, 그럼 엄마를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또 뭔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아예 다시 태어나야 하나?


내가 그 얘기를 풀어놓았을 때 요조는 이렇게 답했어.


-너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야. 우리는 애초에 그래.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알았으면 우린 그 사람만 계속 쫓아다니다가 결국엔 살인이라도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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