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팔마스는 없다
오성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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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바다가 삶이고, 삶이 곧 바다였던 남자 심만호가 등장한다. 그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후 자신의 배 무성호와 함께 사라지고, 그의 아들 규보는 아버지를 찾아 해맨다. 규보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1년 동안 ‘이문’ 이라는 곳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문의 원장 한세인으로부터 아버지의 낭독 영상 USB를 받는다. 영상을 보고, 심만호의 오랜 벗 조강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규보는 아버지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버지가 쓴 글이 또 다른 문이 되어 당신을 움직이게 한 근원일까.

사라지기 전 심만호의 아버지 즉, 규보의 할아버지가 떠난 곳 ‘라스팔마스’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아버지. “규보야. 저 배는 항구가 집일까, 바다가 제 집일까.”(p.47), “나는 여태까진 선장이 배를 이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배도 선장을 이끕니다. 운명처럼 서로를 당기는 거예요.” (p.95) 그렇게 운명은 숙명이 되어 심만호는 본인과 무성호가 있어야 할 자리로 떠났다.

‘바다가 집이자 운명이었던 남자’ 카피가 강렬하게 다가왔던 소설 '라스팔마스는 없다'. 소설은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하다. 라스팔마스로 떠난 심만호의 아버지, 그의 아내 성주댁, 심만호,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심만호의 아내 경희까지 규보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액자식 구성으로 이어진다.

무성호를 몰기 전 외항선 선원으로 일했던 심만호는 규보가 태어나던 날 스페인의 비고 항구에 있었다. 휴게실 책장에 꽂혀있던 옥편을 꺼내 오랜 시간 한 글자 한 글자 읊어보며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던 심만호, 그때 그가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귀할지 짐작해본다. 읽다가 문득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강원도 동해를 가로지르는 한 선장이 등장했다.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냐는 PD의 질문에 선장은 국문학과를 나오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며 시 한 편을 읊조렸는데, 사라져가지만 잡고 싶은 시절의 꿈을 품은 선장과 잡고 싶지만 사라져가는 기억을 품고 늘 그렇듯 바다로 나아가는 심만호의 모습이 어쩐지 겹쳐보였다.

망망대해 위를 당연하듯 항해하는 심만호와 그의 배 무성호. 규보는 바다와 배를,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 심만호가 쓴 글의 내용이 인상 깊었다. 비록 환상이었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p.22 생명의 빛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맹목적이었다.

p.23 숱한 세월을 넘실거리면서도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는 배에 ‘무성호’라 이름 붙였다.

p.25 “배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은 바다의 일부가 되는 거다. 일부가 된다는 건 가진 모든 걸 내어놓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

p.47 “규보야. 저 배는 항구가 집일까, 바다가 제 집일까.”

p.95 나는 여태까진 선장이 배를 이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배도 선장을 이끕니다. 운명처럼 서로를 당기는 거예요.

p.112 “바다는 늘 거기에 있다. 물안개나 비구름이 잔뜩 낀 날에도, 해일이 일고 태풍이 쓸고 간 뒤에도. 성질이 난 바다가 섬을 삼키려 들 때도 있었다. (······)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바다는 마음을 바꾸고 자리로 돌아가. 해를 보드랍게 만지작거리거나 투명한 물빛을 내어놓으며 이리 들어오라 하는 거야. 바다에는 거북이가 살고, 소라가 살고, 가자미가 성게가 해파리가 살고······, 그리고 거기에 네 아버지가 있어.


#라스팔마스는없다 #오성은 #되겠다는마음 #부산소설 #해양소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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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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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 요소.

여기서 '주'를 가리키는 ‘집’은 인간 생활의 필수 요소인 만큼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고요 속에서 깊이 잠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미래 p.232) 라고 말하는 소설 속 인물처럼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온기 가득한 나의, 우리의 집일 것이다. 집은 아파트, 빌라 또는 주택 등의 건축물을 넘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의미하지만, 요즘 말하는 집은 어떠한가? 아마 부동산으로써의 의미가 강할 것이다. 우리는 자가니, 전세니 하는 것들로 심지어 지역, 아파트 브랜드, 평수 등으로 은근히 계급을 나누기도 한다. ‘나의 집’을 갖는 것이 최종 목표일 정도로 집은 휴식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설은 집이라는 매개체를 두고 공존하는 사람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친구의 임대 아파트에 3개월 머무는 미애, 다 무너져가는 집이 견디기 힘든 세미, 집주인의 대리인으로 월세를 받으러 다니는 부부, 한때 집으로 가까워졌다 집으로 무너져버린 집주인 만옥과 세입자 순미 등 어쩐지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집 보다는 집을 둘러싼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 두드러진다.

여덟 개의 단편 모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20세기 아이’, ‘자전거와 세계’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20세기 아이’는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집에 살고 있는 세미가 등장한다. 잠시 머무를 거라고 말한 엄마는 사계절이 지나도 말이 없다. 지나치게 고요하고 무뚝뚝한 동네, 다 허물어 가는 집 때문에 더 거칠어지는 듯한 가족, 그런 생활이 지겨운 세미는 어느 날 집을 보러 온 부유한 여자의 안정감에 마음이 요동친다. “네 덕분에 집이 아주 환하구나.”(20세기 아이 p.61) 라는 여자의 말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아이. 따스한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이 아이가 유독 마음에 쓰인다.

‘자전거와 세계’는 조그마한 집도, 직장 생활도 어느 하나 안정되어 있지 않은 현지가 등장한다. 현지의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지만 가벼운 타박상 임에도 퇴원을 하시지 않는다. 더군다나 직장 동료인 정민과 오해로 틀어진 후 심리적 불안함에 잦은 실수를 연발하고, 매주 연습하는 자전거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할머니는 높은 액수의 합의금을 받기 위해 거짓으로 입원했고, 받은 합의금은 넓은 집을 장만하는 데 보태라며 현지에게 건넨다. 현지는 수치심을 견디며 보험 사기를 저지르는 할머니의 모습에 큰 실망감을 내비치지만 화를 내면서도 돈 봉투를 받는다. 이렇듯 선과 악의 경계에 서있는 우리는 고르지도 펀펀하지도 않은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삶을 살아간다. 피해야 할 장애물들이 끝도 없는 이곳이 삶이라면 모순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집이라는 물성이 새삼 복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집이 주는 어떤 분위기의 힘은 크다. 그 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저 축복을 비는 귀한 마음만 있다면 어느새 우리가 머무는 집은 안온함이 넘쳐 흐르는 공간이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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