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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식탁 이야기 - 처진 어깨를 도닥거리는 위로와 초대
김호경 지음 / 두란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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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일지, 아니면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부분일지는 몰라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잊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있다.

시간 때문에, 상황 때문에, 관계 때문에, 문화 때문에 그 안에서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본질적인 것이든, 비본질적인 것이든 잊어버리고 있으며, 잊혀지는 것들이다.

어찌보면 이렇게 잊어버리고, 잊혀지는 삶 속에서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잊어버린 것들을 찾고 회복시키는 것이 '삶'일지도 모르겠다.

일하는 목회자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식사교제를 하며, 함께 관계를 맺는 부분일 것이다.

모든 목회자가 다 한다?

물론 그렇지만,(그러나 그렇지 못한 목회자도 꽤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함)

일반적인 목회자들은 그 외에도 다양한 사역의 모습들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특히나 본인과 같이 담임목사, 부목사가 아닌 '일하는 목회자'에게는 다른 사역의 모습이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주를 이루는 것이 사람들과 약속을 잡는 것이고,

사람들과 약속을 잡다가 보니 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만나는 일이 잦고,

그러다가 보니 이런 저런 삶을 나누는 관계로 이어지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이것이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건물도, 교인도, (유형의) 교회도 없는 목회자가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게다가 영혼에게 평생을 집중해야 한다는 사명을 배웠으니 그것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런 평범하고도 아무렇지 않는 일상의 일들이 성경적임을 알게 되었다.

성례전, 특히 '성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이 파고들면서 식사(밥)이라는 것이 중요한 성경의 요소임을 알았다.

성경의 모든 것에는 식사(밥)이 중요한 사건마다 등장하고 있었고, 그 사건의 중심을 이루기도 한다.

만일 이 해석이 맞다면? 내가 보는 성경의 관점이 이것이 맞다면?

일하는 목회자로 내가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최선의 것이 아닌가?

그러던 중에 정말 기다렸던 책이 한 권 나왔다.

김호경 교수님의 <예수의 식탁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이 책이 출간될 것을 알고 기다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 해 줄 책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정확히 묘사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말하는 또한 우리에게 일상이 되는 '식사(밥)'를

우리의 신앙과 연결지어 이야기 해 줄 책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온 것이다.

물론, 찾아보면 비슷한 내용의 책이나 논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어투와 말의 전개로,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성경적 접근과 해석,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서두에 저자는 이런 말을 던진다.

내가 예수에게 듣고 싶은 한마디, 예수가 할 것 같은 한 마디는 "밥 먹었니?"다.

너무 쉬운 말이다. 정말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물으실 것 같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이고, 성경에 그런 내용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포인트의 메시지만 기억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이기는.

물론 중요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메시지는 성경의 중심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다.

그러다가 보니 그런 영웅적이고 화려한 이이야기만 각인되고,

우리의 일상은 꽤나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고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잡고 있다.

다윗의 신앙, 모세의 신앙, 엘리야의 신앙이 중요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 관심이 있으심을 알아야 한다.

그 일상 중의 일상이 우리가 먹고 마시는 삶에 대한 것이고,

우리의 식탁과, 좀 더 적나라하게 한국식으로 말하면 '밥 먹는 것'에서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은 먹었니?', '식사는 했어?', '뭐라도 좀 같이 먹을까?'라는 지극히도 일상의 말이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와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삶의 모습이어야 함을 이 책은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예수에게는 아마도 그저 함께 먹는 것이 즐겁고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이 나누는 위로와 평강이다.

우리를 일으키는 것은 기분 좋게 나눈 이야기에 얹어 놓은 밥 한 숟가락이다.(p.19)

그렇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는 것을 기뻐하셨다.

아니, 소외된 자들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기뻐하셨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그 자리는 공격의 자리가 되기도 할지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식탁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하다.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행위를 의사가 병을 고치는 일과 동일시했다.

그것은 회복이며 구원이었다.(p.26)

우리에게 먹는 행위, 곧 식사는 그저 일상에 불과하지만,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 말씀하시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물리적인 식사교제로만 끝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구원을 보여주는 그림이 되고 있으며, 구원에 까지 이르게 하는 신앙의 본질임을 말이다.

이 책은 그 논조를 20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 주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끌고 간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행위, 식사, 밥 먹는 것이 회복되어야 할 영성인 것처럼 말이다.

아니, '것처럼'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관계성이 추락하고 관심도 없어지는 이 시대에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핵심적인 영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책은 기가막히게도, 이런 일상의 영성을 '교회'로 풀어내며 도전을 던진다.

서로의 입에 떡을 넣어 주던 초대 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교회는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는 모임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존엄이 무너지는 곳에서,

그것을 다시 살려 내어,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곳이 교회다.

자신에 대한 오해와 믿음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에 대한 욕심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주는 곳이 교회다.(p.152)

적지 않은 교회가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이야기 한다. '초대교회의 영성'을 이야기한다.

난 묻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회복이고, 무엇이 영성이란 말인가?

이곳저곳을 아우르는 전범위적인 선교?

말씀 묵상과 금식이 신앙의 정도를 매기는 종교적 매진?

다 좋다. 다 맞는 말이고, 언젠가는 누군가는 소명에 따라 해야 하는 큰 그림이다.

지금은? 지금 서 있는 곳에서는? 지금 관계 맺고 있는 곳에서는?

도대체 교회의 큰 그림은 무엇인가? 이웃을 사랑하며 섬긴다고 하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모여진 헌금으로 보탬이되고, 필요한 물건들을 나누어 주는 것 다 좋다.

근데 정말 그것이면 될까? 이 시대의 흐름만 봐도 무엇이 필요한지 대부분 아는 시대에?

먹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단지 그 부족함만 채워주면 되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기가막히게도 그 부분까지도 확실하게 짚어 준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풍성하고 과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최소한의 것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삶의 기본을 채울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 즉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p.149)

문장 자체는 먹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채움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지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끼의 밥보다 함께 먹는 한 번의 식사.

하나의 빵보다 함께 나누는 한 번의 이야기.

한 번의 약속보다 함께 삶을 공유하는 반복적 약속.

이것이 지금의 시대에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사랑을 전하는 최선의 도구와 방법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귀한 메시지를 반드시 읽어내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귀한 메시지를 반드시 살아내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귀한 식사(밥)의 영성이 회복되길 바란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제자훈련 교재, 성경공부 교재, 전도 프로그램.

잠시 내려놓고, 내 전화기를 들어 한 끼 식사할 누군가를 찾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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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삶에게 -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토드 빌링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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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했었다.

어두운 생각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삶, 흔히 말하는 내세에 대해 강조하는 편이다.

죽음이 어떤 의미이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그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일종의 결과지(?)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철학의 영역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다루고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

물론 철학이라는 영역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할 '정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서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히 있다는 것이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기독교에서 더 진지한 논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분명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일진대,

그리고 성경이 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이유가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벗어날 수 없는데,

기독교는 '죽음' 자체보다는 '구원과 영생'이라는 키워드에만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중요하다.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너무 가볍게 여기고 이후의 삶만 논의 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적으로 '구원과 영생'에 대한 심각한 받아들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할 때에, '구원과 영생'에 대한 갈망이 진지해지고,

'복음'이 진짜 우리에게 참다운 좋은 소식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찾아보아도 '죽음' 자체에 키워드를 맞춘 신앙서적은 그리 많지 않다.

간혹 죽음의 이유를 말하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요함을 피력하는 부분들은 있으나

크리스천으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심도 있게 다루는 책은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눈길을 끄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두란노에서 출판된 토드 빌링스의 <죽음이 삶에게>라는 책이다.

사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책 표지의 왼쪽 윗면의 문구가 이 책을 펼치게 하였다.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그저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죽음에 관한 이론적인 논쟁이나 신학적 정리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죽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데

단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만 말하고, 죽음 이후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여정 한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은 어떠해야 하는 것이었다.

먼 미래의 어느 시점을, 별 영향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은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 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짧은 문구는 충분한 매력이 있었던 표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듯한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을 때,

그저 죽음을 문자적으로만 이야기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상황의 설명을 통해 알았고,

이 책의 무게감이 여기에서부터 비롯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받고 암 공동체에 속한 다른 이들을 알아 가는 여정에서 나는 인간이 필멸의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수단임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어 가는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을 주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p.18)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자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탁월함이라는 것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잘 정리를 하는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러나 상황적으로나 독자들과의 거리의 근접성을 고려해봤을 때,

저자의 상황은 가장 죽음을 솔직하면서도, 이미지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을 꼬집는다.

분명 우리는 건강을 이야기하고, 건강하게 살려는 노력들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한다.

의학에 기대든지, 운동에 기대든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삶의 목적 방향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저자는 그 건강이라는 것의 목적이 과연 올바른 성경적 방향성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죽음과 역행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잠시 멈춰 서서 체크할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정말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가 말해왔던, 성경을 통해 말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죽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위한 영적전쟁처럼 살아왔던 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방향성일텐데,

저자는 그 목적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의학을 모두가 죽어 간다는 일상의 현실에서 우리 눈을 가려 줄 은폐물로 여기고 매달린다.

최고의 의학적 치료도 죽음이라는 진단 앞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학적 돌봄을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받지 않고, 우리의 독재적 주인이 될 수 있는 금송아지로,

스스로 만들어 낸 신으로 바라본다.(p.171)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니,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은 문제가 있는 상태이고,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려 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를 때에 죽음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물론, 당연한 부분이 있다. 맞는 부분이 있다. 결코 그 신앙적 방향이 틀리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고 느꼈던 것은,

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강이라는 것이, 그 단어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육적인 건강을 원하시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못함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질병에서부터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우리 삶의 0순위 기도제목이며,

우리 삶의 문제가 있는 영역들이 본래대로 회복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바램과 우리의 상태가 너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에서 그것을 저자는 어찌보면 냉정하리만큼 꼬집으면서 분명하게 자리잡으려고 했다.

죽음과 상관없는 삶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죽음이 삶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죽음이 삶에게 주는 그 메시지에 귀를 닫고 있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적 제자도라는 길에서는 죽을 존재인 우리의 한계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및 이웃의 한계를 주기적으로 정직하게 떠올려야 한다.

기독교 제자도라는 길에서는 죽을 운명이라는 상처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생명을 주는 길, 자유와 사랑의 길이다.(p.20~21)

죽어가는 과정은 성장의 기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울 기회다.

우리 삶의 죽음의 구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피조물이 이르러야 할

성숙해지는 한 단계다.(p.92)

어두운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병상에 앉아 있는 중병 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기 보다는 삶의 여정임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직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동시에 신앙의 여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은 준비해야 하고, 과정 가운데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기에

죽음 역시 그런 시선으로 대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은 이 시기에 귀한 서적이 출간 된 것 같다.

분명히 생각해봐야 하지만,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보게 하는 책이 나왔다.

시대를 역행하는 책이 아니라, 시대에 진작 등장했어야 하는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시선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똑바로 두라는 것이다.

정말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초점이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리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최후의 기독교적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생명 연장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시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분의 백성은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내세에서 온전함을 완성하게 될 이들이다.

우리 자신만 놓고 보면 내세에 들어갈 권리도, 자격도 없다. 우리는 내세를 누릴 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선물이다.(p.322)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물을 받는 자들의 역할이라면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도 사용하신다. 죽음도 선한 것으로 사용하신다. 그 섭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의 이 시대의 귀한 영적 거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신앙적 거름이 되기를 소망한다.

죽음을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진짜 복음을 볼 수 있기를, 진짜 복음의 여정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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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월간) : 1년 정기구독
두란노서원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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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할 때에 중요한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다.

신앙생활은 내 스스로의 패턴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중심이 아니라

당연히 진리가 중심이고, 그 진리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저 문자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흐름 안에서의 메시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맞추어 해석, 적용하는 것은

정말로 필요하고, 이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의 분명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중요한 것이고, 삶을 통한 경험 가운데

말씀을 녹여내는 것은 정말 귀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지금 시대에는 직접적인 경험 말고도

우리가 시대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가이드가 되는 자료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접목 시킬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회적생활보다 목회에만 집중하는 목회자들에게는

그러한 도구가 너무나 필요한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두란노에서 펴내는 <목회와 신학>이라는 목회 전문 월간지이다.

아마 각 지역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부교역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거나

비치되어 있는 자료들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목회와 신학이라는 월간지와 부록으로 <그말씀>이라는 성경연구지로 구성되어 있다.

부교역자시절에 우연히 함께 사역하는 전도사님이 정기구독을 하고 있길래,

괜찮아보여서 약 2년 동안 정기구독을 했었던적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그대로 장점은 분명했다.

<목회와 신학>은 신학이론과 목회 현장을 연결하는 시대적 방향의 자료를 제공하는데,

그 시기에 고민해보아야 하는 주제들을 가지고 여러 관점에서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번 2022년 2월호의 키워드는 <MZ세대를 품는 목회>가 그 키워드이다.

아마 젊은 친구들이 아니고서는 MZ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쉽게 알기에는 청소년, 청년들이랑 소통하는 교역자가 아니고서는

어려움이 있을 것인데 <목회와 신학>은 그것들을 제공한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본인도 말로만 들었지, MZ세대를 정확히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번 2월호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부터 분명히 하고 그들을 품을 목회를 소개하고 있었다.

웬걸~ MZ세대에 나도 포함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MZ세대는 일반적으로 1981~1995년 출생의 밀레니얼 세대와

1996년 이후 출생인 Z세대를 통합한 명칭이라고 한다. - 본문 중에서 -

그리고 그들의 특징으로는 경계없는 세대, 디지털 근본주의, 멀리플리스트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내용을 읽어봐도 100%이해가 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을 <목회와 신학>같은 월간지가 아니고서 알 수 있는 통로가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될까?

그렇게 MZ세대가 어떤 이들인지를 소개하는 것만이 아니다.

1. MZ세대와 신앙양육

2. MZ세대가 원하는 목회 리더십의 3가지 특징

3. MZ세대에 선포해야 하는 말씀의 방향

4. MZ세대의 특정과 교회 의사결정 구조의 변화

5. MZ세대와 소통법

등등에 관한 내용을 약 7~80페이지에 걸쳐 설명해 주고 있었다.

물론 이 내용을 그대로 적용할지 말지는 목회자들의 선택이나,

분명 이 시대의 주류가 되고 있는 세대에 대해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말고도, 신학적으로 필요한 내용, 이슈와 진단할 내용들을 제공함으로

분명 이 한권을 읽으면 어느 정도 시대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을 함께 제공한다.

부록으로 제공되는 <그말씀> 또한 마찬가지이다.

매월 주제별로, 또는 책별로 구분하여 성경연구의 내용을 제공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이번 2022년 2월호의 주제는 '승리'에 관한 것이었는데,

어떤 특정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타난 승리, 신약성경에 나타난 승리, 교리 설교를 위한 주제 해설, 내러티브 설교 등

각 주제를 가지고 어떤 원리와 방향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해놨다.

참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이원적 구성으로 만든 것 같다.

<목회와 신학>을 통해서는 실질적인 삶의 내용들을 파악하게 한다면

<그말씀>을 통해서는 그 파악한 내용들을 가지고 실질적인 설교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들을 제공하고 있기에 아마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이용하는 월간지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목회자들의 방향성과 설교 준비 등이 어떤 자료들만을 의지해서는 안 되지만,

분명 이 자료들은 기독출판사에서 많은 목회자분들의 조언과 내용제공으로 인해 준비되어지기에

나눔이 되고 도움이 되고 영향이 되는 자료제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컨텐츠의 내용들과 이것들 사용하시는 목회자들의 사역이

부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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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좁은 길 - 구원받은 성도의 분명한 증거
폴 워셔 지음, 황영광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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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즈음, 한창 십자가 복음에 빠져 있을 때에

내 생애 최고의 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한 권을 마주하게 되었다.

폴 워셔 목사님의 <복음>(생명의 말씀사, 2013)이라는 책이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답답함 한 가운데 던져진 사이다와도 같은 말씀이었다.

이 시대가 참된 복음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며, 답답한 심정에 충격의 못을 박는 듯한 메시지였다.

지금도 누군가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권하는 책 중에 하나이다.

이유는 그냥 내용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다.

사실 읽는 이에 따라서 폴 워셔 목사님의 메시지는 거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의 메시지,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이 선포하는 심판의 메시지, 경고의 메시지를 가감없이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폴 워셔 목사님의 또 한권의 책이 나왔다.

<좁은 문, 좁은 길>,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복음의 정수를 던진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말씀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 21, 23)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일 주님에게 인정 받지 못한다면? 말씀 그대로 나를 모르신다고 하신다면?

그것이 내 착각이었다면, 헛된 열심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폴 워셔 목사님은 종교생활을 신앙생활인 것처럼 착각하는 인생들에게 다시 한 번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다.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성경적인 것 마냥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 생각을 깨뜨린다.

'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철처히 회개함으로 엎드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육신적인 것에 인생을 내어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추찹한 행동을 당장 집어 치우라고 말한다.

더 이상 착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지 않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성경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육신적이고 악한 삶을 살며

매일매일 죄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본성이 주어졌다고 가르칩니다.(p.40)

그러면서 동시에 고린도후서 13장 5절의 말씀을 들어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은 참 유명한 말씀이면서 중요한 말씀이다.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왜 실제적으로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해 보는 크리스천은 없는가?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우리가 정말 성경적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고, 반성하고, 다시금 결단하며 새롭게 살려는 몸부림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이 시대의 교회와 크리스천은 정말 큰 착각을 멈추어야 한다.

문화적 요소와 시대적 요소가 바꿔 버린 기독교가 맞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넓은 문, 넓은 길이 다수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엄청난 오해의 홍수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아마도 당신은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그리고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 크리스천으로 걸어야 할 길을 걸어야 한다.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이 말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지 날마다 확인하고 또 점검하는 것,

그래서 구별된 길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임을, 그것이 본질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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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 성도가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신비
박순용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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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신아의 기본적인 마음을 이야기 할 때면

빼놓치 않고 이야기하게 되는 성경구절들이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이야기하자면 빌립보서 2장 5~11절의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며 그 내용의 해석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렇게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 주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말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쉬우나 그렇게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어찌 우리가 할 수 있겠다고생각을 할까?

그러나 박순용 목사님이 쓰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책은

우리의 그런 나약한 목소리에 대해 핑계를 대지 말라고 하며,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빌립보서 2장의 마음을 반드시 품으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조나 흐름을 보면 강해서 같이 느껴진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의 구절 하나하나를 분석하면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앙서적처럼 술술 읽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덤벼들면 조금은 지루할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구조적 흐름의 전개방식을 사용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권면한다.

아니, 권면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크리스천의 모습임을 드러낸다.

그저 좋은 성경 구절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마음을 깨달아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 되자'는 구호를 외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을 선동하면 잠시나마 하나 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하나 됨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어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p.31)

그렇다. 신앙생활을 탁상공론이 아니다.

앉아서 성경 구절을 줄줄 왼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한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교회가 되어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어진 지상명령을 따르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다.

그것이 아니면 크리스천의 삶이 아닌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동안 자주 들어온 말씀이라고 하여서, 좋은 말씀이라고 하여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수준에 머무를 우리의 삶이었다면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말하는, 아니 주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구조와 흐름은 강해서처럼 보이지만,

챕터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이 책의 저자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는지,

동시에 주님은 저자를 통해 이 마음을 우리에게 얼마나 전하시려 했는지,

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성도가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신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 신비가 우리의 참된 신비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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