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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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대를 일컫어 흔히 차별과 혐오의 시대라고 말한다. 특정한 그룹이나 인물을 비하하는 표현이 흔해졌고 그만큼 문제의식도 커져가고 있다 여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혐오는 어느시대에나 있었다. 태초부터 정해진 성별과 인종 외에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멸시하는 일은 과거에도 빈번했다. 지금의 시대가 좀 더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것들을 쉽게 접할 수 있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혐오의 표현은 생활 속 여기저기 산재해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에서부터 말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저자는 첫장에서부터 굳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모두가 쓰니까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말 중 일부는 누군가에겐 차별의 뜻을 담은 표현이 된다. 결정장애, 다문화, 급식충 등등. 이런 단어들의 기원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차별의 뜻이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책에서 말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정의다.

내가 처음으로 소수자 그룹에 관해 인식하게 된 것은 초등학생때였다. 그때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던 시대라 일주일에 몇 번씩 문방구를 들러야했다. 기억하고 있는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물을 미리 사두고도 색깔짙은 펜을 들여다보며 이것도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장애자냐?라는 물음이었다. 그 말은 일종의 유행어었다. 장애자냐는 말을 들은 아이가 아니라고 소리침에도 내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 그런식으로 친구를 윽박지르는 모습을 꽤 봐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엔 문방구 사장님이 있었다. 사장님은 아이에게 다가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리 언니 이름이 장애자인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되느냐고. 어른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일까, 기세등등하던 아이는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몰랐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장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한번씩 생각나는 에피소드다. 그렇다고 내가 '장애'라는 말을 쓰지 않았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았다. 어원은 알고 있으나 의미는 한없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다. 철저히 비장애인의 시선에 맞춰진 생각이었던 셈이다. 가볍게 쓰는 의미의 결정장애는 편리했고 그 이면에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는 건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차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들춰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겪지 않은 문제에서 차별을 느끼기 어려워한다. 교통약자가 되어보지 않고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소수자그룹에 속해보지 않고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소속감을 갖고 그 과정에서 차별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느 집단이 다수일 때나, 한 집단에 오래 있으며 편견이 공고히 자리잡을 때도 그렇다. 때문에 이상적인 '평등'이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어렵기 때문에 정답을 찾기도 난해하다. 책 속에 나오는 차별의 예시들을 보며 그렇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하는가? 고민해봤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차별받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그 차별을 이해할 수 없다니. 불편해질때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특권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어렴풋이 이게 잘못된 건가?라는 의문이 떠오를 땐 늘 계기가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때였다. 소수자를 대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차별이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편협했던 생각이 부끄러워지던 때가 있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스스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싶은대로 왜곡한 이미지를 그대로 믿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차별까지는 아니지않나 생각하고, 정당함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공감했던 부분들이 많았다. 난민 문제를 겪으며 예맨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말할 때, 여성과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야기할 때가 더욱 그랬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은 몰랐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차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없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생겨나는 차별과 혐오표현만 봐도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차별적인 세상에서 수많은 차별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6년전에 쓰여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일들을 보면 '이런 일이 있었어?'라는 생각보다 '아직도 이러고 있네'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있어야 하는가? 프롤로그부터 부끄럽게 했던 책을 보며 수없이 물음을 던져 보았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차별을 모두 다 알게 되었다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여전히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할수도, 내가 이해하기 힘든 차별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평등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어쩌면 일상의 차별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일 지 모른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 소심한 반대가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작고 소심한 행동일지라도 무언가 필요하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차별은 흔하고 일상적으로 존재하며 평등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행동할 이유이며, 바뀌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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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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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누군가는 사랑, 또다른 누군가는 재물, 누군가는 인권이나 법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람마다 우선으로 두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나면 적어도 그 가지중 하나는 '선(善)'이라 답할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 부당함에 맞서는 의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는 용기같은 것들로 발현되는 선의 의지 말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이 많다. 게다가 삶의 모습 또한 복잡하기 이루말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삶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복잡한 도로 위에서 위태한 걸음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펄롱은 딸들이 수녀원 인근의 손꼽히는 세인트 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만 있다면 만족할 남자였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며 석탄 배달부로 일하는 펄롱은 가능한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선의가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펄롱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5명의 딸을 함께 길러내는 아내는 펄롱과 의견이 달랐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그의 어머니를 거둬준 미시즈 윌슨의 도움을 받은 펄롱과 달리 아내는 '힘들게 사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의 무덤을 판 사람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아내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당시의 아일랜드에 막달레나 세탁소가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1985년의 아일랜드에는 정부와 종교의 묵인아래 타락한 여자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여자들을 착취하고 감금하며 노동하게 하고, 죽는순간까지 세탁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강제 수용소인 세탁소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혼모, 강간 피해자, 어린 아이 등 아무 죄없는 여자들이 수용소에 갇혀 보호라는 이름의 학대를 당한다. 석탄 배달을 하다 그 실체를 맞닥뜨린 펄롱은 자신을 비롯해 아내와 딸 5명으로 이뤄진 가족의 미래를 두고 거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실제 있었던 역사를 가져온 소설의 줄거리는 꽤 단순한 편이다. 일생일대의 선택이 남의 이야기가 되면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볼 수 있는 것처럼, 펄롱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진실을 알게 되고 이대로 외면하거나 혹은 외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선택 중 하나를 해야하는 펄롱의 상황은 위태로워보이는 한편 결말이 정해져있단 느낌을 받게 했다. 소설에서 이러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대개 주인공은 올바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담담하며 함축적인 이야기는 독자를 펄롱의 내면으로 서서히 끌어당긴다. 때문에 설렁설렁 읽으면 그걸로 끝일 소설이지만 찬찬히 보면 이것만큼 어려운 글이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분량이  많지 않다고 만만하게 봤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갈수록 대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종일관 숨막히듯 조여오는 상황이 답답했고 사회적 제도 아래 착취당하는 여성과 살기 위해 문제를 외면하는 여성이 교차될 땐 안타까웠으며 마침내 펄롱이 수녀원으로 향했을 땐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소설을 읽기 전엔 막달레나 세탁소에 관해 몰랐다. 수녀원에 석탄배달을 하러 간 펄롱이 엉망인 모습의 여자아이를 보게되며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강까지만 데려다달라, 대문 밖으로만 나가게 해달라,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달라 이어지는 애원을 보며 나도 펄롱처럼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그냥 물에 빠져죽고만 싶다는 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들었다. 끝내 수녀원에 갇힌 아이를 외면하고 나와 엉뚱한 방향으로 도망치듯 길에 접어든 펄롱과 함께 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도로 위에서 만난 노인에게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라는 대답을 듣는순간까지도 말이다.


 


삶은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라했던가. 막달레나 세탁소를 알게 된 이후에도 펄롱이 보는 거리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나는 이 부분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고. 물론 펄롱 또한 마찬가지다. 세탁소의 비밀이 알려지기 전 그가 다섯 딸의 아버지라 딸을 걱정하는 모습, 문득문득 나타나는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과 까마귀로 대변되던 불길함이 스쳐지나갔다. 펄롱의 내면은 내내 그토록 치열했다. 사람이 부당함에 맞설 용기를 내기까지의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을 보고 싶지 않아하고 외면하고 싶어하며 내가 나서기 전에 부당함이 해결되길 원한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기원이고, 어떻게 보면 비겁한 외면일 뿐이라 여길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내면의 갈등이야말로 사람의 솔직함이라 생각한다. 누구라도 눈앞에서 부당함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는 내면의갈등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거슬리는 것을 보면 자꾸 생각이 난다. 이러한 이치는 펄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예배당으로 걸어가는데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14주된 아기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달라는 세탁소 아이의 청을 외면하고 놔두고 나와 미사를 보러갔다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서 하필이면 가장 더러움을 타는 석탄 작업을 하던 펄롱이 석탄광에서 소녀를 발견한 것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은은한 배척을 받았던 펄롱이 자신보다 더 아래에 있는 세탁소의 여자들을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변화는 이토록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 같기도 해서다. 펄롱이 선을 행하기로 결심한 것 또한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랜세월 궁금해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 계기였다. 펄롱은 자신이 자라는 동안 곁을 지켜주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던 고민의 해답을 찾는다. 오래전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수녀원의 아이에게도 똑같은 것을 나눠주자고. 그렇게 수녀원에서 세라의 손을 붙잡고 나온 펄롱은 쏟아지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꿋꿋하게 광장을 걸어간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비로소 세탁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세라가 펄롱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본 광장의 조각상을 보던 모습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져다놓은 조각상은 성모의 모습도 어린 예수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세라의 눈길을 잡아끈것은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대상이 아니라 갈색 당나귀 조각상 하나였다. 수녀원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수와 성모는 소녀에게 구원이 아니었고,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자 위선의 증거였다. 수녀원을 방문하는 그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던 손을 잡고 나서던 순간 세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아기를 생각나게 하는 당나귀를 눈에 담았을까. 담담히 풀어내는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다보면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장치들을 배치해뒀는지 알게된다.



이쯤에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펄롱의 질문에 답을 찾아보자면 의미를 찾기 전에 이미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몸과 정신이 미성숙한 어린아이일 때부터 도움을 받고 자라나 나도 모르는 사이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곁에 있는 사람이나 만들어지는 물건까지도 홀로 생기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곤한다. 살아가다보면 지쳐서 혹은 제 멋대로 살며 항상 홀로 살것처럼 당당히 버티다가도 사소한 계기에 무너지기도 누군가가 내민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정한 손을 내미는 것은 왜 이리 어렵기만 한 것인지. 펄롱 외의 사람들의 선택이 마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너머로도 내밀어진 손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으니까.



책을 다 읽은 뒤엔 왜 이런 제목을 붙였나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곤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역설적인 화법이 아니었을까. 펄롱의 모습을 보며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기보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 시도해보란 뜻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세상엔 사소하기만 한 일이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펄롱의 어머니에게 손내밀어준 미시즈 윌슨의 작은 선의가 펄롱을 살렸고, 그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펄롱은 세월이 지난 뒤 세탁소의 학대받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아이를 구했다. 이렇듯 나는 사소함이 일으킨 선의 순환고리를 믿는다. 선의는 반드시 선의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세상의 다정함을 볼 때마다 조금씩 자라난다. 비록 누군가에겐 사소함으로 끝날 뿐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일생의 구원이 될 수도 있다. 펄롱이 구한 소녀 또한 어쩌면 펄롱의 어머니일수도 있었던 소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작가의 생각을 소설을 통해 모두 읽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해 치열히 고민하고 행동한 흔적을 소설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삶의 길 위에서 위태로워질 때면 선의를 향한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사람다움'을 마음에 되새겨야겠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이뤄진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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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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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를 고르시겠습니까?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천천히 인생을 돌아보고 단어를 고르는 데 고심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이는 소설 속 사람들의 부고를 쓰는 요양사가 자신의 일을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양사는 '묵 할머니'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다. 고작 3개의 단어로는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다며 코웃음 치는 묵 할머니는 3개는 적고 9개는 너무 많으니 8개의 단어가 마음에 든다는 말과 함께 요양사에게 떠올린 단어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기 시작한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7개의 단어를 말한 묵 할머니는 요양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목차에서부터 여덟의 인생으로 분류해 두었듯 묵 할머니는 여러 인생을 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졌던 이름으로 살았던 평양 소녀의 인생,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해 새로운 이름을 받은 소녀 시절의 인생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위한 가명을 쓰기도 한다. 이름에 따라 몇 개의 삶이 나뉘는 탓에 좌절할만도 하건만 '묵 할머니'는 오히려 그러한 분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삶도 변화시키며 살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하면서도 악착같은 삶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목적은 항상 '삶'에 있었다. 그저 살기에 급급한 시대였기에 그 목적은 충분히 소녀를 살게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아남기 위해 치워내고, 살아남기 위해 위안소를 탈출했으며 또한 먹고 살기 위해 미군부대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용기였다. 강한 의지로 삶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은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는 자들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폭력을 휘두르며 강자임을 과시하기보다 약자의 방식을 택해 강하게 살아남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상깊었다.

흙을 먹는 기묘한 '토식증'을 가지고 있는 소녀의 행적은 어머니가 되어서도 늙은 '묵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어진다. 왜 하필 흙을 먹게 되었을까. 순수한 충동으로 시작해 특이하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란 현명한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란 소녀는 갈수록 영민해진다. 그러니 독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흙'이라는 개체는 어쩌면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갈망임과 동시에 어떤 의식이 아니었을까라고. 충동이라고 하기에는 흙을 먹는 그녀의 모습에서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소설을 보는 동안 화가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던 장면들은 모두 땅 위, 즉 흙 위에서 일어난다. 지금의 포장된 도로들을 보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광경이지만 과거의 길은 흙내음이 풍기고 흙 본연의 붉은색 혹은 밤색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삶이 목적이었던 그녀에겐 흙이란 잃어버린 터전임과 동시에 어떻게든 발 붙이고 살아가야할 지반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스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표지의 색들은 '묵 할머니'의 삶들과 닮았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발맞춰 숨가쁘게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끔 한다. 역사적 사실을 그저 역사로만 치부하고 과거에서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계속해서 '묵 할머니'와 같은 이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던 그녀는 스스로 길을 개척한 끝에 자식을 위해 마지막을 준비한다. 요양원의 별난 치매 노인 '묵 할머니'는 요양원을 탈출해 어느날의 과거로 향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천장이 하늘을 막지 않는 곳, 포슬포슬한 흙이 있는 곳, 삶을 이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활용한 수단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묵 할머니에게선 마지막 단어를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집어삼킨 마지막 단어가 여자일수도 희생자일수도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없다는 건 누구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묵 할머니'의 삶은 나의 삶이 되었을 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부분 때문인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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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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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페트리쇼르'에서 시작해 '페트리쇼르'로 끝난다. 가뭄을 만난 식물이 분비하는 기름방울이 땅에 떨어져 스며들었다가 비가 오면 뿜어내는 냄새에 빗물이 섞여드는 것을 일컫는 말인 '페트리쇼르'는 주인공 중 하나인 '그'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복잡한 감정 또한 불러일으킨다. 반면 '그녀'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페트리쇼르에 관한 것을 비롯해 그가 무엇을 떠올리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녀는 잠자는 것조차 연기하며 유쾌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는 중이다. 한물 간 배우이자 정치인의 트로피 와이프로 살며 그녀는 조금씩 마모되어갔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와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렸을 때 광고와 영화를 찍었다는 것과 방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 현실을 알기 전의 세상이 아름다운 것처럼 두 사람의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매트리스 위에서 안온한 날과, 평화를 연기하며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들었다. 매트리스 광고의 장면을 촬영하는 건 어른의 이해관계 때문이었으나 매트리스 위 두 아이의 세상은 많이 달랐다. 그저 잠을 잘 수 있어서 좋았고, 가만히 있어도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으며 부모에게서 내몰린 묘한 유대감까지 있었다. 하지만 곧 매트리스 상품에 관한 불만을 아이들에게 화풀이하듯 풀어내고, 여자와 남자가 하필이면 매트리스 위에서 손을 잡고 자는 장면을 촬영했다는 것에 음란하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두 아이는 또다시 냉혹한 현실로 내던져진다.


소설을 보고 있자면 비가 내리는 날, 막아줄 것 하나 없이 어둑한 거리를 걷는 사람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약한 온기가 겨우 닿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이 번갈아가며 엇갈린다. 솔직히 서술적인 측면에서 혼란스러웠다. 그와 그녀, 그녀와 그는 매번 뒤섞이고 꿈 속에서 헤매듯 몽롱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게이가 된 그는 스쳐지나가는 사람과도 성관계를 하며 과거의 인물을 그리워하고, 도통 현실세계에 발붙이고 싶지 않아하는 그녀는 꼭 찾아야하는 아들이 있었다. 과거 촬영한 영화가 다시 상영할 기회를 얻게 되며 영화제에 초청된 두 사람은 영화제를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했던 아이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만난 것이다. 이후 그동안 잠을 잘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곁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고, 그는 그녀의 곁에서 불안함을 잠재워간다.


소설 속 천산갑이라는 동물은 지극히 예민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죽어버린다. 몸을 둥글게 말고 마치 부끄러워 하는듯 그대로 생을 달리한다. 하지만 이런 천산갑은 어린 그와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마치 동류라는 듯이,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최대한 함께 살아내는 방식으로 자리를 내어줬던 것이다. 이런 두 아이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 바로 영화였다. 어른인 감독은 영화라는 방식을 통해 기묘함을 기록하고 천산갑은 그로인해 죽어갔다. 두 아이가 천산갑의 시체더미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천산갑의 품 안에서 편히 쉴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무해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바깥과의 접촉에서 자신을 지키듯이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에서 천산갑은 떠나가 버렸다.


어른이 된 여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는 일평생을 방황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찾아내며 살기보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하게 된 선택이었다. 억압된 자아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때문에 소설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탄압당한 그녀의 아들과 아들을 위해 낙태되어야했던 여아들, 트로피로 살아야했던 그녀 자신, 여자라서 겪어야했던 위협 모두 그녀의 게이친구 즉 게이미와 연결되며 기묘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계속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기보다 외로움과의 싸움을 하며 살아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마지막에서야 되찾은 그녀와 그의 이름은 좀 더 단단한 결심같아 보이기도 한다. 제목의 '67번째 천산갑'이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다. 내내 웅크리고 살아갔던 두 사람이 낭트로, 덮어뒀던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향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거대한 천산갑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두 사람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인상깊었다. 그러니 빗속에서 맡았던 페트리쇼르는 이제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같이 공유한 의지가 되는 셈이다. 내내 두 사람이 만나왔던 수많은 천산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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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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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저주에 사용되는 건 예쁘게'라는 문구 때문에 궁금해진 것도 있고,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선정 소식 때문에도 궁금해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저주토끼'가 단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좀 기괴하고 호러물 같기도 하며 SF 느낌도 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그정도만 알고 직접 읽어본 소설은 뭐라 딱 집어말하기 힘들정도로 기묘하고 기괴하다. 장르소설 독자로 수많은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 기괴한 것을 좀 봤다 생각했는데 이건 또 색다른 맛이었다. 이전에 본 작가 인터뷰에서 약한 독자는 기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실감했다.

책의 제목과 같은 ‘저주토끼’는 가장 앞쪽에 있었던 이야기다. 저주에 쓸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을 했던 할아버지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 토끼 전등을 정성들여 만든다. 저주를 받는 쪽이 손을 대야 하므로 꼭 손이 갈만큼 이목을 끌어야했다. 남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고 잘 사는 사람에게 하는 복수의 의무를 짊어진 토끼는 할아버지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당사자의 집안으로 향한다. 토끼가 너무 예뻤기 때문일까, 분명 복수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저주가 과연 한 사람만의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주를 내리는 물건을 대대로 만들어왔던 주인공의 집안에서는 과연 저주의 결말을 몰랐을까? 분명히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이후로도 이어진다. 단편 '머리'에서는 사람이 만들어낸 배설물을 통해 하나의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쯤되니 무섭다라는 후기에 100프로 공감할 수 있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소설을 보고 난 다음엔 괜히 화장실에서 찜찜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혹시나라는 생각이 드는, 괴담같기도 하고 거부감이 드는 이야기였다. 그 밖에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만했던 이야기, 피임약을 오래먹어 남편없이 임신해버렸다는 괴기한 이야기, 인간의 곁에 있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반려자와의 충격적인 이야기 등등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단편들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너무 낯설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소설들이다. 그럼에도 이 낯선 이야들에도 공통점은 있다. '저주토끼'안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모두 결핍과 쓸쓸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돌이켜보면 단편들이 희망적으로 끝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이상한 일을 겪으면서도 나아가며, 마지막 결말을 맞는다. 그럼에도 소설 이후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쩌면 좌절과 상처를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작가 후기에 밝혀둔 것처럼 세상은 원래 쓸쓸한 곳이고, 복수나 권선징악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한 곳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이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쓸쓸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기괴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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