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고래뼈 요람
김유정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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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 작가 김유정의 신작 소설선 '고래뼈 요람'​은 단편인 '진저와 시나몬', 중편인 '고래뼈 요람'의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감성 판타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재된 감성을 툭툭 건드리는 듯 했던 두 이야기는 천천히 읽어봐야 그 참맛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단편 '진저와 시나몬'

 

 -  “이름이 없거나 익명이거나 예명인 자들은 그렇게 떠돌 것이다.”

가짜 이름으로 살아가는 두 남녀의 달고도 씁쓸한 감성 단편 「진저와 시나몬」

 

생강계피(ginger cinnamon) 차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 '진저와 시나몬'은 질문자의 질문 하나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최근에 누군가와 감정적인 교류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그리고 이어지는 케이트의 이야기.

진저색 붉은 머리의 경찰인 케이트는 24시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 시나몬을 만난다. 시나몬은 겉으로는 통통 튀고 발랄한 성격으로 케이트와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요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두 사람은 '진저와 시나몬'이라는 팀명을 이루며 제법 잘 어울려 지낸다.

 

하지만 둘 다 진명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별명같은 케이트로 불리길 원하는 남자, 그리고 극의 역할같은 시나몬이라고 불리길 원하는 여자 단지 그것 뿐이다.

소설에서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정체를 드러낼 법한 단어가 없었다. 심지어 케이트가 여자친구를 지칭하는 말도 '그녀'였다.

케이트와 시나몬은 제법 친해졌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의 이름을 가진 관계일 뿐이다. 낯선 타인. 그래서 더욱 자신의 마음을 적당히 비춰볼 수 있는 그런 관계.

소설의 중반쯤부터 시나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자아정체성을 드러내고 무언가에 쫓겨가는 듯 하면서...

하지만 그녀의 짐은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다. 케이트는 철저히 타인이므로 그녀의 주위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에게 이미 시나몬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버렸지만 시나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관계 맺어진 것은 진명이 아닌 가명이기에 두 사람은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균열을 드러낸다. 처음엔 아무 의미없었던 조그만 틈이 갈수록 벌어져 케이트와 시나몬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벼랑이 있는 것 같았다. 시나몬에게는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나몬은 케이트를 밀어낸다. 케이트는 그녀를 거쳐간 수 많은 타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시나몬에게 케이트라는 사람의 의미는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해방될 구실에 불과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가늘게 이어갈 관계가 필요했을 뿐.

 

달고 씁쓸한 시나몬처럼 이야기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그녀는 그의 머릿속 지하실에 보존되었고 그를 살게 했다. 케이트의 시나몬으로 존재했다. 이름이 없거나 익명이거나 예명인 자들은 그렇게 떠돌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 그 사람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과 생각에 맞춰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의미다.

케이트는 자신만의 시나몬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다. 정작 진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시나몬이라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그렇게나 불확실하다.

 

마지막에 케이트의 독백은 그것을 인정한다. 자신만의 시나몬은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처음엔 이름으로 엮이면 그 사람과 엮이는 것이 된다 뭐 이런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훨씬 더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관계의 불확실성.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뭐하나 속시원히 그게 진정한 정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익명 그리고 가명에 의존해 서로에게 선을 긋고 있어서 철저히 타인처럼 관계하며 살아간다. 케이트와 시나몬은 결국 서로에게 타인인 것이었다.

 

 

 

* 중편 '고래뼈 요람'

 

- “우리 마을의 하늘에는 뼈만 남은 거대한 고래가 살고 있다.”

어느 날 문득 하늘에서 떨어진 한 소녀의 정체는?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는 삶에 대한 집요한 믿음을 간직한 작품 「고래뼈 요람」

하늘에 커다란 고래뼈가 떠있다.

꿈의 세계. 뼈만 남은 거대한 고래 엔이 떠다니는 이상한 마을. 얼핏보면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어느 날 그 평화롭던 마을에 사소한 규칙 하나가 깨졌다. 여관에 이름표도 내용물도 없는 트렁크 하나가 도착한 것.

미스테리하면서 알쏭달쏭한 분위기. 초반 이런 내용들때문에 읽기가 힘들었다. 대체 이 분위기는 뭐고 이 마을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래뼈의 정체는 뭘까? 수많은 의문들이 뒤따랐지만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문장들도 그렇고...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 빈 트렁크의 주인인 듯 엔(=고래뼈의 이름)의 근처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진 기묘한 소녀는 마치 공기인 것처럼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 옷이 물에 젖지도 않는다. 이 소녀의 등장으로 크리스티안의 숨통이 막힐 정도로 평온하던 일상이 흔들린다. 하늘에서 떨어진 크리스티아네는 크리스티안과 이름마저 비슷하고 백발을 가진 외모마저 흡사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크리스티아네는 밤중에 가만히 멈춰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곳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낮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달빛과 별빛만이 검은 주단 같은 밤하늘 위에 희끄무레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중략)

당신들은 죽은 이들이었구나.

그리고 아마 나도.

 

크리스티아네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죽은자의 마을이라는 것을 깨닫고 며칠 후 트렁크가 돌아왔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네는 아직 죽지 않은 그저 길을 잃고 마을에 떨어진 상태로 이방인처럼 마을에서 떠도는 존재다.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크리스티아네는 크리스티안과 평온한 일상을 보내지만 점차 얽혀있는 인연의 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안과 크리스티아네의 관계도...

이어진 감정. 서로에게 닿지 않았던 감정. 고래뼈가 떠있는 곳에서 둘은 비로소 서로를 마주한다.

그동안은 마치 고래뼈가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너무 갑갑했다. 때문에 서서히 관계가 밝혀지고 일의 인과가 드러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흥미를 더해갔다.

하지만 이야기가 후반을 향해갈 수록 세계의 균열도 같이 찾아온다.

 

엔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 짧은동안만을 빌려 존재하는 마을.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불안한 평화. 마치 빙판위를 걷듯 크리스티아네는 걸어갔다. 사연있는 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자신의 의미이자 기도였던 크리스티안을 찾아온 크리스티아네.

 

빈 트렁크에서 나온 기차표는 세계의 종말을 고했다.

그동안 해묵었던 갈등이 서서히 풀리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지만 고래뼈가 있는 이 세계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넘어가야 해. 넌 살아 있고 난 이제 죽었어. 너는 나의 꿈이고 기도지만, 나는 너의 병이고 어둠이야. 나는 너의 주변을 보이지 않게 도는 달이고 너는 나 없이도 스스로 회전하는 세상이야. 그러니 넌 우리처럼 되면 안 돼. 서로 소중한 존재였는데도 헤어지고, 발버둥쳐도 불행에 사로잡힌 우리처럼 되면 절대로......"

 

그리고 이별의 순간 크리스티안이 간신히 건넨 고백의 한마디. '...... 나는 네가 와 주어 기뻤다.'

30년을 건너뛰어 전해진 연애편지가 아련한 분위기를 더했다. 마침내 크리스티아네가 기차를 타고 떠나자 마을은 무너져내린다.

 

 

'고래뼈 요람'의 두 소설은 관계가 키워드였던 듯하다.

가명으로 맺어진 관계, 비슷한 이름을 따서 지은 두 사람의 관계...

상큼발랄하게 끝나지 않았던 감성판타지이지만 긴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이야기 모두 상통하는 바가 있어 읽으면서 이야기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천천히 읽어보면 여운이 길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은 물처럼... 이 소설도 그런 잔잔한 분위기를 한껏 맛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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