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광주로 떠나고
‘삐이이...’하고 신호음이 울리자 박 회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박 회장의 목소리엔 위엄이 담겨 있었다.
“회장님, 희연 아가씨께서 오셨는데요.”
“들어오라고 해.”
박 회장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회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데스크를 보고 있는 안내원이 희연이한테 공손하게 말했다.
희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희연은 회장실로 갔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근데 무슨 일이세요? 절 갑자기 보자고 하시고.”
“일은 무슨? 저녁은 먹었니?”
“아뇨. 아직.”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꾸나.”
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은한 불빛 아래, 박 회장과 희연이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그 곳은 박 회장이 즐겨 찾는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그 날의 스페셜 요리와 화이트 와인이 놓여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이 그들의 식사를 한껏 분위기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박 회장은 화이트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말을 꺼냈다.
“내일 광주로 내려간다며?”
“예.”
“집사람이 괜한 걸 너한테 부탁했어. 이젠 별 일 없을 텐데 말야.”
“전 괜찮아요. 아버님.”
“어쨌든 못난 내 아들 놈 때문에 니가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라뇨?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그 녀석이 그렇게 좋으냐?”
희연은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 녀석은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소꿉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좀 도와 주세요.”
“내가 도와 줄 필요는 없을 거야. 적어도 그 녀석은 나하고는 달라서 인정은 있거든. 결국 니가 원하는 대로 될 거다.”
“정말 그렇게 되겠죠?”
희연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 될 거다.”
박 회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희연은 박회장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도 일말의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희연이는 유진이가 자신을 떠나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것이 희연이를 더욱 불안하게 했고 그래서 희연은 언제나 유진이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다음 날, ㄱ대 학교 운동장 안에는 한 대의 버스가 서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버스에 시동이 걸렸을 때 버스를 향해 희연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다시 버스의 문이 열렸고 희연은 버스에 올라타더니 숨을 고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유진은 희연이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같이 갈려고 왔어.”
“피아노 연주회는 어떻게 하고?”
“피아노 연주회는 다음에도 얼마든지 있는 걸. 뭐.”
유진은 희연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연은 여지껏 피아노 연주회가 있는 날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피아노 연주회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그런 희연이가 피아노 연주회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것도 희연이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유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연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진 않았다.
희연은 뒷좌석에 비어있는 민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니가 웬 일이냐?”
민이는 희연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려고 왔어. 차 놓치는 줄 알고 뛰어 오느라 혼났어.”
“어쨌든 환영한다. 너도 이제 우리와 뜻을 같이 하게 됐으니 말야.”
민이가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환영하긴 아직 일러. 난 너희와 뜻을 같이 한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럼 뭣 땜에 우리들의 여행에 동참한 건데?”
“그거야 목적지가 같기 때문이지. 하지만 목적지가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는 목적이 다 같은 것은 아니잖아.”
“그럼 네 목적은 뭔데?”
“그냥 광주에 한 번 내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사과도 할 겸해서 말야.”
“사과라니?”
“우리 아버지 광주에서 사람 많이 죽였거든.”
“그래도 넌 니 아버지랑은 좀 다르구나.”
“다를 거 없어. 만약 똑같이 그런 상황이 또 일어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행동할 테니까. 나도 아버지를 닮아가지고 내가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고 하거든.”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너무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어제 리포트를 밤새 썼더니 너무 피곤한 걸.”
희연은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두 눈을 감았다. 민이는 그런 희연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만 보이던 희연이의 얼굴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