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짝사랑
나연은 시계를 보더니 책가방을 챙기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맑고 따뜻한 토요일의 오후였다. 투명한 햇살이 나연이의 얼굴로 쏟아져 내려 쓰고 있는 금테안경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연은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책가방에서 OB라고 쓰여 있는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파마를 약하게 해서 웨이브진 나연이의 머리가 모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벚꽃, 교정 안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잎들은 간간히 미풍에 날려 한껏 운치를 더해주며 떨어졌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더없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연은 혼자서 교정의 호숫가를 걸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연은 이런 날 야구장에 갈까 하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혼자 가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그 골치 아픈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연은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야 겠다고 생각하며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교정을 나서려는 순간 나연은 앞에 재수 오빠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연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연은 재수오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그만 재수한테 거의 다 와 가지고서는 넘어졌다.
“오빠, 안녕하세요.”
나연은 일어나면서 청바지를 털었다.
“안녕. 덤벙이.”
“오빤 덤벙이가 뭐에요?”
“그러게 좀 조심하고 다녀라. 넌 어째 허곤날 넘어지고 그러냐? 그러니까 준석이가 너한테 2% 부족하다는 소리나 해대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내가 어디가 2% 부족하다는 거에요?”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준석이가 한 말이라니까.”
“하여튼 그 바람둥이 오빠는...... 뭐, 바람둥이니까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토요일인데 학교엔 웬 일이야?”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공부가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근데 오빠 어디 갈 데 있어요?”
“아니. 그건 왜 물어?”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지 않을래요?”
“야구?”
재수가 되물었다.
“왜요? 오빠는 야구 싫어해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요. 괜찮죠?”
“그러지. 뭐. 나도 마땅히 할 일도 없는데.”
재수는 순순히 나연이의 청에 응했다.
나연은 속으로 ‘야호’라고 외쳤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은 180도로 바뀌고 말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애인처럼 정답게 주고 받아?”
민이가 재수의 어깨를 탁 쳤다.
“말 조심해라. 난 몰라도 나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런가?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너도 나 잘 알잖아? 워낙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타입이라는거.”
민이는 이번에는 순순히 재수의 말을 수긍했다.
“괜찮아요.”
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지만 속이 좀 씁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이럴 때 민이 언니가 나타날 게 뭐람?’ 민이 언니는 재수오빠와 같이 있을 때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근데 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민이가 다시 물었다.
“나연이가 야구 보러 가자는데 너도 같이 갈래?”
“그거 좋지. 그러고 보니 오늘 OB 와 LG경기가 있는 것 같던데.”
나연은 민이 언니하고는 같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암만해도 토요일 오후, 최고의 황금시간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연이 넌 OB팬인가 보지? OB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니까.”
민이가 물었다.
“네. 언니는요?”
“난 LG팬인데. 그럼 우린 라이벌인가?”
민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라이벌이라도 됐으면 좋겠네요. 재수 오빠한테는 언니만 있으니 어디 제가 끼어들 공간이 있어야죠?’
나연은 속으로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잠실 야구장을 찾았다. 서울의 라이벌 전이라 그런지 관중석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응원전도 여느 때보다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시합은 그야말로 명승부였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9회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LG 3번 타자의 끝내기 안타로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야구도 언니한테 졌네요.’
나연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야구장을 나왔다.
햇빛은 많이 수그러져 있었고 거리엔 제법 찬바람이 불었다.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는 게 어때?”
민이가 말을 꺼냈다.
“넌 무슨 여자애가 또 술타령이냐?”
“넌 마시기 싫으면 그만 둬라. 나연이 하고 마시면 되니까.”
세 사람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근데 돈은 있는 거냐?”
재수는 의심쩍어 하는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게 무슨 걱정이냐? 우리한텐 장관 딸이 있는데.”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나연은 나즈막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거부감이 담겨 있었다.
민이는 나연이의 딱 부러진 말에 조금 놀랐다.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됐어요. 그만 술이나 시키죠.”
술과 안주가 곧 나왔고 또 다시 술자리에서의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나연이가 끼어들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 사람이 있는데도 나연은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나연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세 학생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나왔다. 거리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재수는 먼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민이는 나연이를 부축한 채 걷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나연은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있었다. 둘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왔다.
“집에 갈 수 있겠어?”
민이가 물었다.
“걱정 말아요. 갈 수 있으니까.”
나연이는 지갑에서 패스를 꺼냈다.
패스를 개찰구에 넣고 안으로 들어간 후 나연은 민이를 돌아보았다.
“언닌 참 좋겠어요.”
나연은 말을 마치고 나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민이는 나연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한 표정을 하며 서 있었다.
나연은 지하철이 들어오자 지하철에 올라탄 후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늘도 재수 오빠는 민이 언니하고만 있었다. 그 자리에 자신은 없었던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