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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평점 :
정의마저도 소비되는 세상.
정의와 공의마저도 소비되는 세상이다. 교회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수없이 울려 퍼지는 정의에 대한 담론이 이상하게도 힘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성서를 탐독하며 성서야 말로 정의와 공의의 근원이며 성서의 하나님이야 말로 가난한자와 약한 자의 하나님이라 말하는 이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지만, 이 메시지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의 메시지가 구체적인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책상위의 담론에 그치기 때문이리라.
정의를 위해 살아온 정치인들. 이들이 지금껏 정의를 위해 힘써 싸워왔던 사실을 의심치 않지만, 한계를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민주정부시절이 지난 10년의 시간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시절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때에도 여전히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울고 있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마주하지 않는 정의는 언제나 부분적이며 가볍고 공허하다. 혹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미얀마의 사태가 이를 반증한다.
여기 구체적인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씨름한 학자의 책이 나왔다. 그는 사회역학자이다. 질병의 원인을 추적하는 학문이 역학이라면,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다. 우리는 건강에 대해 보통 의료기술을 떠올리지만, 사회 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를 고민한다.
저자는 사회적 원인에서 벗어난 병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질병은 사회적이다. 가난과 차별, 불평등과 파괴된 공동체 등은 우리 몸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저자는 이 흔적들을 추적한다. 그저 책상위에서 통계자료만 본 것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세월호 사고의 생존자와 유가족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소방 공무원, 성소수자, 왕따와 차별을 겪은 이들 등의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하며 이들의 상처와 아픔, 질환에 대한 ‘원인의 원인’을 연구해왔고, 그 흔적을 고스란히 이 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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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질병은 사회적이다.
“미세먼지가 천식을 유발하고 석면이 폐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겪는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 역시 병을 유발할 수 있다.” 사회 속에서 차별과 폭력을 받아온 이들이 스스로 문제없다 말할지라도, 아니 차별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문제없다며 애써 괜찮다고 다독일 때 실은 우리 몸은 더 아프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은 주어진 고정물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질병을 보기 위해서도 개개인의 내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권력과 정치에 대해서 물어야하고, ‘질병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
예컨대, HIV/AIDS의 사망률을 보면, 현재 의학의 발달로 HIV/AIDS는 당뇨나 고혈압과 같이 관리를 잘하면 평균 51.4세나 더 살 수 있는 수준까지 발달되었다. 하지만 2012년 한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 HIV/AIDS관련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은 100만명이 넘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지역도 이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콰줄루나탈 지역의 기대수명은 52.3세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성인 기대수명 61.4세보다 9년이나 더 낮았다. 콰줄루나탈 지역의 사망의 원인은 주로 HIV/AIDS 감염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4년 남아공 국가가 나서서 공공의료보험을 통해서 치료약을 제공하자, 7년 만에 기대 수명이 12년이나 증가했다.
또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르 받은 대부분 동유럽국가들의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은 각각 14%, 16%증가했다. 효율이라는 이름하에 공공의료 시스템과 사회안정망에 투자하는 비용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올 경우 결핵 사망률이 평균적으로 31%나 줄었다.
저자는 이런 원인을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현상너머에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을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그들이 가진 개인의 질병 때문에 죽은 것인가? 사회 구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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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이래로 2배 이상 늘어났다. 10만 명당 약 30명을 바라보는 수치는 다른 국가들의 두 배를 넘어선다. 그 이유로 저자는 비정규직 고용에 주목한다. 패자부활전이 존재하지 않는, 해고된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해고는 곧 살인이 될 수 있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은 삶을 뿌리째 위협한다. 여기에도 사회적 죽임이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2009년 이후 지금까지 29명이 뇌출혈, 심장마비, 당뇨 합병증, 자살로 죽어갔다. 해고노동자들 중 50.5%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것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걸프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의 22%, 포로로 잡힌 군인들의 4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것으로 볼 때 전쟁후유증 이상의 고통이 이들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쟁은 한번으로 끝나지만, 이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까지 전쟁터 한가운데 있다. 이 고통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사례는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행해진 심리치료는 오히려 이들에게 더 큰 폭력이었다.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찬 가족의 죽음과 은폐된 진실이, 또 부당한 회계조작에 따른 폭력적인 정리해고가 그들의 고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결코 치유를 말할수 없다.
안 그래도 높은 자살률 중에서도 특히 성소수자의 자살 시도비율은 한국의 일반인들보다도 9배가 더 높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다른 나라의 두배이상 높은 것을 감안할때 18배는 더 높다는 말이다. 자살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들에 있어서도 성소수자들이 약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사회가 성소수자에게 특별히 더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고통 받고 죽어나가는 것은 사회에 의한 죽임이다. 저자는 고통받는 성소수자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진심으로 기득권의 한사람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며, 피하지 않고 함께 비를 맞겠다고 말한다. 입장의 동일함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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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감수성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을 울리는 것은, 사회적 구조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향한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다가갈 때에도 혹여나 자신의 조사가 이들의 아픔을 더 후벼 파는 일이 되지는 않을지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들 편에 서서 비를 함께 맞는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또 그가 바라는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누구보다도 이 말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이런 감수성,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서있을까? 저자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맞겠다고 말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비를 같이 맞아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비를 내리게 하는 주체로 서있는 일은 그쳐야 하지 않을까?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예민한 감수성, 또 타인의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이런 감수성을 오늘날 교회는 가질수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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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될수록 건강해진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다루는 장에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될수록 건강해 진다고 말한다. 그 예로 미국펜실베니아 주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인 마을인 로세토마을에 주목한다. 로세토 마을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즐기고 비만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심장병 발병률이 낮았다. 저자는 그 이유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세토 마을은 유난히 즐겁고 활기가 넘쳤고, 부유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고 행동했으며,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주는 사회였다.
특히 이 마을의 지도자 니스코 신부는 마을주민들의 정치적인 참여와 교육을 독려했고, 당시 마을주민들이 일하는 채석장의 근로자들이 1시간당 8세트라는 극단적 저임금으로 일하는 것을 알게 되자, 직접 채석장사장과 협상을 시도했고, 협상이 결렬되자 직접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주도했다. 니스코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마을의 고유문화를 만들어 갔다. 부모가 사망하면 그 집의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고, 가족이 경제적으로 파산했을 때 그 가족을 돕는 것은 공동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로세토의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 때는 당신도 당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요.” 저자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사람들이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은 기꺼이 힘겨운 삶을 꾸려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소망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일 때 우리는 더욱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고통 많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파하는 이들을 향한 공감, 예민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듣고 보고 배워왔기에, 우리에게 타자를 바라보는 예민한 감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애써 노력해야만 한다. 타자에게 눈을 돌리고, 아픔의 자리에 함께 서기위해 힘써야만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이런 감수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책을 통해 바라본 그의 삶은 그 바쁘다던 의과대학시절부터 방학 때면 산업재해 노동자들을 찾아 자원상근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재활병원에 있는 사지마비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저자를 만들었으리라. 저자와 같이 주변에 있는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길 소망한다. 한걸음의 실천과 관심이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있으리라.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이 책 꼭 한번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