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꽃향기 -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과 함께한 침묵의 고백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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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진트리의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 다섯 번째 책.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가 베네치아의 푼타 델라 도냐 미술관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내며 쓴 글이다.

나는 종종 비공개의 마음이 되고 싶지만(말하지 않은 것만이 오직 내 것이 된다면 더더욱), 동시에 도무지 말하지 않고는.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는 안 되는(그러면 내 존재가 유예되는 느낌마저 들어서) 순간 또한 있다. 이제는 평생 동안 지속될 이 두 마음의 줄다리기가 인생의 또 하나의 정의라 믿으며.. 그러니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제일 먼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가 나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글을 어떻게 계속 읽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베네치아에 특별히 끌려서도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도 아니라, 오직 하룻밤 '갇힌다'는 그 사실("... 이 구속으로부터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때문에 편집자의 제안을 수락한다(그런데 갇히러 간 곳에서 마음이 활짝 열려 버리면 혹은 이중으로 갇혀 버리면 어떡하죠?).

슬리마니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읽다가 울프가 <자기만의 방>의 속편을 상상했음을 그리고 그 제목이 <열려 있는 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방이 있어야 열어 둘 문도 있지요). 그리고 이건 아침이 되어 슬리마니가 미술관을 나설 때와 절묘하게 이어진다("이 문은 계속 열려 있었을까? 만일 내가 원했다면 한밤중에..").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어진 건, 내부로 침잠하여 "결연히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과 "외부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의 사이엔 늘 문이 있다는 것. 나 스스로를 '거부의 벽'으로 둘러쌓았더라도(그리고 결코 부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더라도) 언제나 문이 있다. 심지어 단단한 벽인 줄 알았던 게 사실은 문이어서 안도할 때도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책할 때도 있다. 문을 통과한 것들(쟨 뭔데 노크도 없이 이렇게 금방 들어왔지?)과 끝내 문앞에서 되돌려보낸 것들이 내 기억을 만들고 곧 나를 만들어 왔는데.. 요즘 제 문은.. 어떻게 잘 열려 있던가요? 나는 당신이 문앞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작가의 일은 '기억하는 것'. 그리고 베네치아의 취약함은 이 명령을 더욱 되새기게 한다. 하물며 이 도시의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의 주제도 마침 그렇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유령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보지 못한 것(기억), 보이지 않는 것(유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곧 문학("유령들에게 생명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유령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벽을 손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 속한 동시에 동양에 속한 도시 베네치아, 모로코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한 작가. 이중 정체성. 발밑에 단단한 토대가 없이 평생 부유한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세계 사이에서 사는 듯 '환승 중'인 정체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유령 같고.

취약함이 곧 아름다움이 되는 도시에서 구속이 곧 자유가 되는 체험기. 낮보다 진실한 밤은 끝났고 마법은 풀렸지만 어쨌든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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