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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고전환담>은 문자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답답하고 메마른 역사가 아닌, 인물들이 울고, 웃고, 시기하고, 사랑하며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담은 소설이다.
우리는 역사가 검증을 통한 확인된 '사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옛 사건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또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단순한 가십거리로 간주해 버린다.
이 책은 우리 역사책 속 사실과 사실사이의 빈 공간을 가십이 아닌 단단한 기초 위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창조한 촘촘한 스토리로 채워나갔다.
그 상상력은 대륙의 서쪽, 모래먼지 날리는 페르시아 시장 통을 헤매고, 땅의 북쪽 바이칼 호의 거센 바람을 타고 날아가다가, 동쪽으로 틀어 우리의 터전에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상상력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씨를 담았고 싹을 틔워 이 책이 탄생하였다.
책은 3부로 나눠져 있고 각 부는 8~9편의 단편이 실렸다.
1부 전쟁과 혁명에서는 고구려, 백제와 조선의 역사 속 전쟁과 혁명의 상황에서 갈등하는 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수나라의 침공을 알리려는 선비족 무사의 악전고투는 을지문덕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었다.(요동을 달리는 전사)
2부 현장의 미스터리는 불가사의한 사건의 해법으로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된다. 검무(劍舞)를 추는 기녀와 풍류시인 신광수의 사랑은 임진왜란 후 200년의 시간을 넘나들었다.(칼의 가족)
3부 시간을 초월한 사랑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속 여인들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훗날 선덕이라 불리는 신라의 공주 덕만은 차라투스트라를 신봉하는 배화교도인 서역상인과 사랑을 나눈다.(불과 모래의 기억)
이야기는 상당히 빠르게 전개되며 길게 여운을 남긴다. 소설의 끝에서 ‘역사와 문헌 ’항목으로 사실과 허구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책 한 권으로 사람의 편견이 깨지지 않는다.
작가가 '한국형 팩션'을 연재한다는 것을 저자 소개로 알고 미소년의 아이돌이 교과서 읽는 듯한 대사를 하는 '퓨전 사극'이 떠올랐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치밀한 서사 구조와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는 팩션에 에 대한 나의 생각이 심한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 ’을 토대로 한 ‘나는 거지로소이다 ’의 마지막 장면에 화가 김홍도가 나와도 이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 다음을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비어있는 부분은 채우려 꾸준히 노력한다.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면, 노력의 방향을 바꾸어 볼만도 하다. 이럴 때는 정통 역사학자의 시각이 아닌 문학가의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이 소설의 일부에서 옛날 사람들의 대화를 현재의 지역 사투리로 변용시켰다. 고대의 언어를 소설에 쓰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채워져야 할 새로운 빈 공간이다. 물론 그 부분은 역사학과 언어학의 영역이지만, 그들의 노력에 불구하고 그 빈 곳이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면 소설가의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조가 묻혀있는 건릉 앞에서 정약용이 읊조리는 라틴어 작별인사는 신선했다. (비밀서가)
보이는 것도 두세 번 확인해야 하는 세상에서 허무맹랑한 공상만이 폭발하는 퓨전사극류의 소설이라면 언제까지 읽힐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은 튼튼한 기초 위에 꼼꼼하게 아귀를 맞춰 쌓아 올린 탑과도 같은 소설이기에 오랫동안 독자의 손에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 책의 많은 소설들이 역사의 진실로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도 해본다.
아버지의 유작을 정리하던 이규보의 아들은 시를 쓰게 하는 마귀 같은 존재인 시마에게 자신에게도 시를 쓸 수 있도록 눈을 요구한다. 시마는 대답한다.
"그래 , 내 눈을 빌리려면 나와 계약을 해야 해 .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 미워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겠다는 계약 . 이 계약을 어기면 수명이 줄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 (<시마의 계약 > 154 쪽 )
시를 쓰기 위한 시마의 눈을, 역사의 빈 곳을 메꾸기 위한 상상력으로 치환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 .
환상이 사실과 공명한다면 , 그건 환상이 진실의 징후이기 때문이리라 .(5 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