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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쌀 재난 국가 : 한국인은 어떻게 성공하고 왜 불행해졌는가?
* 본 리뷰는 문학과 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객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크게 기대하며 읽었는데, 기대 이상이다 못해 내가 사회과학 도서에서 미덕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는 책이었다. 현실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지성과 집요하고 꽉 짜인 논리적 구조, 그리고 사이사이에 감칠맛나게 끼워진 유머감각까지! 이보다 더 재밌으면서 정곡을 찌르는 책을 만날 수 있을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이 말을 조금 바꿔본다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최소한 <쌀 재난국가>가 다루는 케이스들에서 이 주장은 타당하다.
한국은/한국인은 대체 왜 이럴까, 하고 염증을 느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질문에 아주 적절하고 타당하며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을 제시한다. 뒤쪽으로 가면 일부 남성들을 포함한 사회의 상대적 기득권층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할 사실들이 통계 수치와 함께 제시된다.
이 책의 연구는 쌀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은 오늘 하루 세 끼 중 최소한 한 끼는 쌀을 먹었을 것이다. 당신이 먹지 않았다면 최소한 당신 주변의 사람이 쌀을 먹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문제 혹은 강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주 간단하고 납작하게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쌀을 먹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 이건 밀도 마찬가지지만, 쌀의 경우에는 농사가 사회를 이끄는 주요 동력이 되어야 한다. 목축업 등이 끼어들 자리가 별로 없다. 마을의 모든 이들은 농사에 뛰어드는데, 마을의 사람들 전체가 한 단위가 되어 한 몸처럼 협업한다. 누군가가 평균보다 눈에 띄게 못하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고 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자식과 자식의 자식을 채찍질한다. 그것이 한국의 원동력이자 지금 한국의 창의적 발전을 저해하는 개인 차원에서의 요인이다.
이를 국가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쌀을 기르는 것이 (끊임없이 돌아오는) 재난을 다스리는 것과 거의 같다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쌀은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의 작물이었고, 지배계층은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우제부터 구휼까지 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자연히 이를 관리해야 하는 국가의 힘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강한 지도자를 선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쌀을 먹기 위해 한국인들은 평등화와 차별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왔다. 그 결과는 계층 내부에서의 평등과 계층의 고착화로 이어졌는데,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 감소와 극도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한 다음 이를 교정하기 위한 제도의 필요성을 말한 후 책을 마친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과 대단한 흡인력을 지닌 책이었다. 이철승 교수님의 전작 <불평등의 세대>도 굉장히 잘 읽었는데, 이 책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쌀과 재난을 둘러싼, 집요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논리의 꽉 짜인 전개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책이 끝나있다. 가볍지는 않지만 이해하기에 무리는 없고, 중간중간에 이철승 교수님의 뼈를 때리는 문장들이 조금씩 분위기를 환기해준다. (특히 괄호 속에 든 멘트들이 재미있음을 넘어서서 웃기기까지 했으며, 이철승 교수님을 실제로 뵙지는 못했으나 굉장히 유머 감각이 넘치는 분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신간 중의 신간이다 보니 현재의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한 이야기들도 조금씩 나오는데,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거나 혹은 궁금해했을 문제들에 대한 답이 시원하고 논리적인 풀이와 함께 보여진다.
적극 추천한다. 사실 오프라인에서도 만나는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있다. 얼굴 본 사람들에게도, 얼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한국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읽어야 한다. 한국에 짜증을 느낀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