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209-210쪽, <'불법'파업과 철학의 빈곤>에서)


파업은 언제나 '불법'파업이라고 읊어대고, 단체행동만 해도 시민의 불편을 외쳐대는 수구꼴통언론의 힘은 막강하다고 봅니다. 신문과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사회에서 '불법'이 아닌 파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전문 시위꾼이라는 말도 횡행하던데, 전문 파업꾼이라고도 떠벌리고 싶을 겁니다.

홍세화의 말대로, 그 어떤 노동자가 파업을 좋아할까요. 최악의 경우 구속과 유죄판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홍세화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파업은 노동자의 최후적 선택일 뿐입니다. 홍세화의 책을 읽고 있으면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마음이 편합니다. 얼마나 사회가 비상식적이길래 상식이 돋보이고 빛을 발하는 거냔.
 

>>>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 한겨레신문사, 2002.   * 총 301쪽.


꽤나 오래 마음의 빚^^; 같은 책이었습니다. 독서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당연히 꺼내들게 된 책이었습니다. 홍세화의 전작(前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를 뜨겁게^^ 읽은 터이기에 책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는 배신을 당하는 법이 거의 없지요.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개정판까지 나왔군요. ^^)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의 분노, 한국사회에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1. 이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홍세화의 책에서 드러나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시각은, 수구꼴통의 논리에 찌든 한국사회에서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타의로(!) 프랑스에서 오래 산 사람이어서인지, 서양 합리주의의 깔끔한 시선을 선사합니다. 그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홍세화의 시도 가운데 하나인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입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눈으로 한국사회를 비판하지만, 그는 '악역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화를 노래하고, 글로벌 경영을 구가하는 한국사회이지만 그 내부적인 상황은 그다지 '세계적'이랄 수 없는 환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세화가 이 환부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치료와 치유가 목적이라 봅니다. 그래서 그는 꿋꿋이 '악역'을 떠맡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역'을 맡은 홍세화의 한국사회에 대한 비평을 총 5부로 나누어 실은 것이 이 책입니다. 수구언론이 하는 짓거리를 까고 까발리고(1부와 2부), 노동자의 연대를 역설하고(3부와 4부), 우리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을 염려합니다(5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국인이면서 한국적이지 않은(!) 홍세화가 품고 있는 생각의 '결'과 한국사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오롯이 드러나는 책입니다.

 
 
2. 노동자라는 인식과 자각의 필요성
 
... 노동자를 바라보는 프랑스 사회의 시각이다. 즉, 노동자들 모두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당연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노동자 정치의식이 생겨날 리 없고 또 노동자 간의 연대감이 생겨날 리 없다. ... 프랑스 판사 조합의 연대 표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6쪽, 197쪽, <체포대를 주목하는 이유>에서)

 
노동자라면, 자신이 사회-경제적 존재로서의 '노동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에서 극우 집권 세력에 의해서 '근로자'라는 말로 대체된 슬픈 운명의 '노동자'라는 말은 노동자들에 의해 복권되어 마땅합니다. '노동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강남 땅부자들을 위한 대통령 후보와 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노동자'라는 자각이 있어야,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전에 작성한 저의 관련글이 있군요. http://befreepark.tistory.com/554 )
 
위의 인용으로 미루어, 홍세화가 그의 아내를 당당히 프랑스 사회의 이주노동자(!)라고 부르는 것(222-228쪽)은 예상 가능한 것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홍세화 자신도 글쓰는 노동자임을 책의 곳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자처하고 표방하고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극우 기득권 세력이 불어넣은 허위의식이 가장 큰 장애물이긴 하겠습니다만. -.-a.
 
 
 
3. 노동자 파업에 연대감을!
 
2001년 11월 경찰 3만 명이 파리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국민 90%가 이를 지지했다. [조중동처럼] '경찰, 왜 이러나' 따위의 사설을 실은 신문도 없었고, 또 그런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도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국민의 정치사회 의식은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불편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서울 시민들은 그렇게 부추기는 신문이나 지식인의 기고글은 자주 접한 반면 연대의 중요성을 주장한 글은 만나기 어려웠다.   * [   ]는 비프리박.   (217쪽, <'이기심이냐 연대냐'>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수구꼴통언론은 시민의 불편을 갖다 붙입니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으로 인해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불법'이란 말도 하고 싶을테구요. 파업을 포함해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법으로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임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거대자본화한 언론과 방송에서는요.
 
시민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입니다. 다른 노동자의 단체행동과 파업으로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좀 헤아려줬으면 합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라면 불편의 감내와 심정적 연대를 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수구꼴통 언론-방송의 논리를 답습하여 노동자 파업이라면 무조건 나쁘고 어쨌든 불법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4.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말에 담긴 폭력성
 
이른바 '국민작가'라는 저 사람[이문열]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사회, 또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지리산의 이쪽 자락과 저쪽 자락이라는 것말고 종족이 다른가, 말이 다른가. 별다를 게 없는 것을 증폭시켜 다름을 강조하고 앵똘레랑스[불관용]로 무장한 사회, 또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5.18 모습을 본 프랑스 사람들이 물었던 첫 질문이 "그 사람들은 소수 민족인가?"였다.   * [   ]는 비프리박.   (87쪽, <'너 전라도 사람이지?'에서)

 
이문열에 의해 가장 극명하게 던져진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질문은, 정말 이런 말 하는 사람은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상대의 어떤 말에 뜬금없이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묻는 자의 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도대체 "전라도"가 어쨌길래? 도대체 "전라도"에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길래? 도대체 "전라도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사회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 기득권 유지세력에 대한 질타를 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지는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말은 이제 "좌빨이지?"로 업그레이드 된 것 같습니다. 광주에 투입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온 몸으로 맞섰던 사람들을 폭도니 빨갱이니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전라도 광주 사람이라는 이유로, 공수부대의 총칼 앞에 쓰러져야 했던 죄 밖에 없는 사람들을 폭도라고, 빨갱이라고 불렀으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좌빨"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5. 상업주의에 찌든 언론과 방송에게 공적 가치는 요원한 꿈?
 
... 무엇을 '톱'[top]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오고갔지만 대세는 이미 모나코 공비[왕년에 유명한 비유였던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 쪽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8시 뉴스 앵커였던] 랑글루아는 이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모나코 공비의 죽음은 모나코 공가 이외에는 그 누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에 팔랑지스트에 대한 테러는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주는 대사건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편집이 끝나고 뉴스가 시작되었다. 막상 랑글루아가 입을 연 첫 뉴스는 테러사건이었다. ... 랑글루아는 그날로 아나운서 생활을 끝냈다.   (133쪽, <기자와 '좁은 문'>에서)

 
홍세화가 전하는 랑글루아의 에피소드(?)에서 언론과 방송의 상업주의와 공적 가치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소한 언론사 또는 방송사가 상업주의 유혹에 질질 끌려갈 때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 누구와 누구가 결혼을 한다고 온갖 매체가 떠들어대고 도배를 할 때에도, 어디선가 탄압 받고 억압 당하고 억눌려 쓰러지는 사람들은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상업주의가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매체로서의 가치"는 내팽개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럴 때 그 매체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앵커들은, 피디들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고요.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8시 뉴스 앵커 랑글루아의 용기는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더더군다나 수구꼴통 언론-방송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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