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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의 영화기행
김성곤 지음 / 효형출판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요즈음 영화에 관한 책들은, 여기저기 극장에서 영화가 넘쳐나게 개봉되고 있듯이, 넘치고 있다. 영화이론을 다룬 책, 영화를 철학텍스트 삼아서 철학을 얘기하는 책, 영화를 문화텍스트 삼아서 한 사회의 상황과 문화 그리고 집단심리를 읽어내는 책, 영화와 과학을 접목시켜 영화속의 과학지식을 읽기 쉽게 풀어낸 책 등등 그 종과 수에 있어서 헤아리기가 어렵다.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니 만큼, 순수영화이론을 다룬 책들은 내 관심밖이다. 내 관심은 철학텍스트와 문화텍스트로서의 영화인데, 이 둘다 그다지 쉽게 읽히는 범주의 책들은 아니다. 이런 책들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마치 페미니즘 이론이 어려운 것과 같다. 자기 학문체계내의 고유한 이론을 갖지 못한 신생 이론들이기에 이론들은 모두 철학에, 그것도 대부분 현란하기 짝이 없는 현대철학에 크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분야만 집중적으로 공부해도 완벽하게 장악하기가 어려운 철학이론들을 이들 페미니즘이론과 영화이론은 베껴쓰느라 정신이 없다. 어떤 글들을 보면 거의 자기도취적이다.
철학이론을 많이 쓰는것 자체를 문제시 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차적인 목적이 결국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가독성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솔직히 철학공부 하면서 글을 좀 현란하고 멋들어지게 써서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고 싶다는 치기어린 생각을 누구나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치기'다. 유치한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어려운 개념,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사태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전혀 배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난해한 이론 일변도의 글들을 무작정 비난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김성곤의 <영화기행>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좋다는 느낌이 든 이유 세 가지. 하나. 재미있게 잘 읽힌다. 둘, 이렇게 좋은 영화가 많았었나, 이 영화에 이런 의미가 있었나, 그래 이 영화를 당장 봐야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은 책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효과이자 결과다.) 셋, 미국인들의 집단심리, 문화의 자락을 들춰 그 속살을 아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점 한가지. 여러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코드를 자꾸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몇 편 정도의 글을 읽고 나면 약간 지루하고 성의없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는 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김성곤이 주로 사용하는 코드는 여성, 장애인, 어린이, 흑인 등 그동안 차별받고 억압 받아왔던 소수집단, 하위주체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반식민주의 등이다. 요컨대 그의 글은 항상, 자기동일성 논리에 의해서 구축된 하나의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나 국가가 외부의 적 혹은 내부의 적에 의해 생기는 균열과 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대처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통해서 영화를 이야기한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탈근대적 사유를 실현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이고, 그렇지 못한 영화는 나쁜 영화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단순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나쁜 영화들이 볼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나쁜 영화들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재미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