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딜쿠샤의 추억 -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 아주 특별한 집
김세미.이미진 지음, 전현선 그림 / 찰리북 / 2017년 12월
평점 :
찰리북 출판사에서 출간한 <딜쿠샤의 추억>은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의 아주 특별한 집을 소개한다. 2005년 딜쿠샤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딜쿠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해 온 김세미, 이미진 작가는 그 이야기를 모아 2013년에 [희망의 궁전, 딜쿠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딜쿠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생소한 이름, 딜쿠샤를 만나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었고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딜쿠샤가 되어 1917년에서 현재까지 함께 한 기분이었다.
이야기는 딜쿠샤의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딜쿠샤가 서울을 내려다본 지도 벌써 100년이 다 돼가는 어느 날, 90여 년 전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딜쿠샤의 정원에서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던 한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 브루스는 딜쿠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한다. 표지에 나오는 인물이 브루스라는 소년과 그의 어머니 메리 테일러이다. 인왕산 성벽 아래 우두커니 서 있던 은행나무 옆 언덕배기에 지어진 2층짜리 붉은 벽돌의 양옥집, 딜쿠샤의 탄생 배경과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딜쿠샤의 탄생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딜쿠샤를 떠날 수밖에 없던 가족 이야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울의 한복판,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조선의 명장,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옆에 신혼부부인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는 집을 짓기 시작했고,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하는 '딜쿠샤'라는 이름을 짓게 된다. 1923년 마침내 딜쿠샤가 완성되고, 테일러 가족은 딜쿠샤의 품 안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을 이방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화가인 메리는 한국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고, 앨버트는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기사를 써 왔다고 한다. 앨버트 테일러 부부는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신혼집을 차렸다고 한다. 왜 한국에 온 것일까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읽어보니 테일러의 아버지가 당시 '운산금강'을 운영하던 금광기술자였고, 테일러는 아버지를 따라 1971년에 낯선 땅 조선에 왔다고 한다. 앨버트 테일러가 지은 이 딜쿠샤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뿐만이 아니라 건축적인 특성과 특히, 앨버트 테일러는 3.1 운동을 세계에 전한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다. 그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기로 한다.
다음은 딜쿠샤를 지으면서 앨버트가 집에 새긴 성경의 시편 127장 1절 말씀이다. 이 말씀 덕분인지 딜쿠샤는 숱한 역경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건축가가 집을 지어도
하느님이 짓지 않으면 헛되고
파수꾼이 성을 지켜도
하느님이 지키지 않으면 헛되도다.
앨버트 부부의 아들 브루스는 1919년 2월 28일, 3.1 운동 하루 전날 태어났으며, 기자였던 앨버트는 3.1 독립 선언서를 전 세계 신문에 한국의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싣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부부로 살며 한국의 산 역사와 함께 한 그들이 내심 불안하면서도 어떤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1940년 아들 브루스는 군 입대를 위해 집을 떠나게 되고, 그날의 작별이 6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된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메리는 가택 연금 조치까지 내려지게 된다. 급기야 부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보금자리였던 딜쿠샤를 떠나게 된다.
1945년~2005년
창문 너머로 바라본 서울
1945년 8월 15일 해방 일로부터 1948년 가을 메리가 혼자 딜쿠샤에 돌아와 고인이 된 앨버트의 재를 양화진 묘지에 심은 일, 1950년 시작된 3년간의 6.25 전쟁, 빌딩을 짓고 터널을 지으려는 위기 속에서도 허물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 딜쿠샤가 2000년대가 되어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까지의 60여 년의 긴 시간을 다룬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사건들이 딜쿠샤 주위에서 일어나지만 다행히도 딜쿠샤는 무너지지 않고, 다만 삶의 안식처가 필요한 가난한 서민들에게 몸을 내어주며 많이 부서지고, 개조되고, 처음의 궁전 같은 모습에서 연립주택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딜쿠샤의 몸에 새겨진 [DILKUSHA 1923]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추측을 낳게 하고, 도시 속에서 테일러 가족을 기억하는 건 딜쿠샤와 은행나무뿐이었다. 2006년 아들 브루스가 한국에 돌아와 딜쿠샤에 대해 알려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6년 어느 겨울날, 66년 전 딜쿠샤와 작별 인사를 건넸던 브루스가 여든일곱 살의 노인이 되어 아내 조이스와 딸 제니퍼를 데리고 오게 된다. 브루스는 딸 제니퍼에게 메리의 마지막 말을 들러주게 된다. 이 집이 우리 가족의 희망의 궁전이 되길 바랐던 것처럼 오래도록 한국인들의 희망의 안식처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이다. 이후 10여 년을 위태위태하게 버텨 온 딜쿠샤는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소식과 함께 하나둘씩 딜쿠샤 품을 떠나는 주민들을 보며 슬퍼한다.
브루스 또한 한 줌의 재로 딜쿠샤 곁을 지켜 온 은행나무 아래에 묻히게 되고, 딜쿠샤는 영원히 테일러 가족과 하나가 된다.
2016년 2월, 서울시와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등이 딜쿠샤를 복원하여 2019년에는 시민들에게 개방이 된다고 하니 그날이 기다려진다. 그동안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던 딜쿠샤가 2017년 8월 8일에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공식 등록하였다는 기쁜 소식도 책의 에필로그에서 전한다.
힘들고 고난의 시기였던 1900년대 의 한국을 고향이라고 생각한 테일러 부부에게는 한국민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글과 그림으로 써 내려간 그 시대의 장본인인지도 모르겠다.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수십 년을 가감 없이 다 내어준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말했던 희망의 궁전이 되어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변해가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의 일제 강점기에 서양인 부부의 건축물은 한 동네에 함께 살았던 한국인이나 외국인에게는 정말 꿈을 전하는 행복의 궁전이 아니었을까.
브루스의 딸 제니퍼가 가족이 소유하고 있던 소장품 수백점을 국고에 환원하고, 딜쿠샤의 가치 보존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한다. 우리 또한 딜쿠샤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존재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마련되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빛내기 위한 노력 또한 해야 할 것이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고, 딜쿠샤가 서 있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또한 높은 건물들로 들어찬 도심 한복판이다. 피와 눈물로 얼룩져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부터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현대의 시점까지 우리는 쉼 없이 달려왔고, 앞으로도 달려갈 것이다. 다만 은행나무 옆 딜쿠샤를 지었던 테일러 부부의 그 마음, 어려웠던 한국인들의 삶의 안식처가 되어 부서지고 무너지고 불타는 고통 또한 지켜내 온 딜쿠샤에 담겨 있는 테일러 가족들의 그 따뜻한 마음은 영원토록 우리들 마음에 함께 할 것이다.
문화재청과 딜쿠샤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딜쿠샤를 기억하고, 그 가치의 소중함을 알고, 테일러 가족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딜쿠샤의 추억> 책을 덮으면서도 아쉬움보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고, 조만간 아이들과 함께 딜쿠샤를 찾을 계획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