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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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05년의 번역 트렌드(인문학)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에 들어서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는 '학문분야별 번역트렌드 점검'이라는 기획특집기사를 냈다.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두 차례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시의적절한 내용이어서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본다. 먼저 옮기는 '인문학' 트렌드는 이은혜 기자의 12월 02일자 기사이다.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이 원전 번역서들의 특징은 기사에서의 지적대로 '해당전공자'들의 노작이라는 점이다.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손(베르그송) 등 사유의 거장들의 주저들이 계속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추세는 말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의 경우, 노학자가 세 차례나 개정 번역서를 내는 동안에 젊은 전공자들이 한번도 손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면서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세대의 정신현상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그러하다(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라면 한 해 동안 남못지 않게 주절거린 터여서 군말을 덧붙이기가 쑥쓰럽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경우 아직 나머지 절반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올해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번역이다. 중역본 논란은 전공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텐데(원전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질'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라는 벤야민 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번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전공자'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번역이 그만한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영어를 직접 옮길 게 아니라 독역본을 중역했어야 했을까?).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 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대호 교수의 <형이상학> 번역은 작년에 나온 발췌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초에 나온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이다. 어쨌거나 서양 고대철학 분야에서도 전공자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니 고무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업그레드한 번역서의 등장은 나 또한 고대하고 있고.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또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만화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루퍼트 우드핀의 <아리스토텔레스>(김영사). 이 역시 전공자의 번역이므로 믿을 만하겠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간된 책들의 종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디알로그>(동문선, 2005)가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트렌드 중의 트렌드'이다. 내 기억에, 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후, 혹은 또다른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알튀세르-푸코-들뢰즈는 차례로 한국의 지식분자들 사이에 '냄비'가 되었다(니들이 들뢰즈를 알어?). 그 긍정적인 효과는 이들의 책들이 단기간에 대거 소개된 것이며 그 부정적인 결과는 상대적인 편식에 따른, 사회적 관심의 불공정한 분배이다('과유불급'은 동양의 오랜 격언이다).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걸 계기로 해서 (아직 미뤄둔 페어퍼들이 많지만) 나도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중첩>을 빼고는 올해 나온 책들은 모두가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겨본 책들이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은 편역서로서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은 아니다. <들뢰즈 맑스주의>와 <들뢰즈와 정치>는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며, <들뢰즈의 시간기계>는 물론 올해 2권이 마저 출간된 <시네마>와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싹트는 생명>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책. 해서, 들뢰즈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년에 <혁명론>과 <정신의 삶>(1권)이 출간된 데 이어서 아렌트 번역은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갑다(나는 아렌트의 책들을 준-전공자 수준으로 갖고 있다). 아렌트에 대해서도 많이 주절거린 바 있으므로 새삼 소개하는 건 번잡스럽다. 그녀의 주저들이 곧 마저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된 번슈타인은 '리처드 번스타인'을 말하며, <현대정치사회이론>(나남, 1988),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번역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천병희 교수는 올해만 해도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댓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노트'들을 제외하면 그가 많은 책들을 썼나?), 소위 '주저'라는 책들은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연구서들은 더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나 라쿠-라바르트('라부-라바르트'는 오타이다)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와 더불어 '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며,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대개가 짧기 때문에 번역/소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듣자-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모두 출간된다면 이 또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가 그의 주저이긴 하지만, 김형효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에 잘 정리돼 있으며, 일반 교양서로 읽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제대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자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부터 읽어야 한다. 이 또한 상당한 견적을 자랑하는 일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대담 자서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로 대강 카바하는 수밖에.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출간은 물론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했던 건 브루스 링컨에 대한 정보. 그가 엘리아데의 제자였다는 것. 확인해보니 링컨은 시카고대학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학에 있어서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였다. 링컨의 책들도 더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의 책들이 올해엔 소개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작년엔 <독설의 팡세>가 나왔었다. 원제는 <고난의 삼단논법> 혹은 <고뇌의 삼단논법>). 올해는 들뢰즈 사망 10주년이기도 하지만, 시오랑(1911-1995) 사망 10주년이기도 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오랑에 대해서 몇 마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0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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