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법 - 우리시대의 수필 작가선
엄옥례 지음 / 수필세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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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옥례 작가의 <타법>을 읽었다. 표지부터 뭔지모를 끌림이 있었다. 표지 설명을 보니 유명한 마음 치유 화가 마크로스코의 Blue and Gray였다. 어쩐지 작품 내용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말부터 읽었다. 진솔하고 담백하고 깔끔하고 경쾌한 문체였다. 짧은 글에서 작가의 따스한 마음까지도 느낄 수가 있었다.

 

내용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4부까지는 작가가 살아 온 자취를 재미와 철학적 사유로 풀어놓았고 마지막 5부는 현재 작가가 사회활동을 하면서 겪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첫 작품 '입 큰 여자부터 읽었다. 시원한 문체, 탄탄한 필력이 느껴졌다. 그 다음 '타법'을 읽고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다음 작품을 읽고 작품 전체를 읽게 되었다. 한꺼번에 거침없이 읽었다. 책장을 덮을 때까지 미소짓다가, 뭉클하다가, 따스하다가, 아름답다가, 부럽다가, 짠하다가 여러 감정을 맛볼 수 있었다.

 

작가가 인생의 고비를 겪고난 뒤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선 여정을 담은 책이라 마음이 우울할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용기내고 싶을 때 일독을 강추한다. 지혜와 통찰, 여유와 휴식을 함께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세상사람들에게 '당신의 타법은 무엇이오?' 하며 넌즈시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게도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꽉 막힌 속이 후련해지는 소화제 같은 수필집을 읽었다. 작가는 서두에서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가 닿기를 바란다고 썼지만 '타법'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았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으로 나가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직도 그 맛은 맵고 쓰다. 대나무 살을 깎고 문종이를 자르는 소년처럼, 나를 깎고 잘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리. 바람을 예정하고 연을 만들고 또 연을 만든 소년만이 꿈을 실어 하늘 높이 날릴 수 있을 터이니.

옛 여인은 베갯잇에 수를 놓았다. 고관대작은 영화가 영원하길 꿈꾸고 가난한 서민은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잠을 자는 동안 머릿속에 차 있던 잡다한 기억과 생각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희망이 스며들라고 베갯잇에 꿈의 무늬를 수놓은 것이다.

새 베갯잇을 빨아 말린 다음 속통을 씌워 이부자리 위에 나란히 놓는다. 황량한 겨울 같던 침대에 화사한 봄이 오자 금방이라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 같다. 모처럼 아내의 역할을 한 것 같아 가슴속에도 애틋한 뭔가가 피어오른다.

친구와 봄, 여름을 보내는 도안 사랑이 움텄던 것이다. 친구가 떠난 뒤에야 그걸 알게 되었다. 여름날, 잠깐 스치듯 내리다가 홀연히 멈추는 여우비처럼 내 풋사랑도 그렇게 끝이었다.

이제 남편도 나도 한 줄기 희망을 살려 작은 열매가 열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우람하게 자라 돋보이고자 하는 욕심보다그저 푸른 숨을 이루는 일원으로 이웃과 도토리를 나누며 오순도순 살고 싶은 마음이다. 운에 맡기지 않고 노력한 만큼 배당받고 사는 삶도 좋겠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말이다.

누가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아 괴로울 때나 묵묵히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을 보호하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때도 거기 규화목은 가르쳐 준다. 그 성깔을 버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라고.

체면과 겉치레, 내게 달라붙은 낡은 타성을 벗지 않고는 새로워질 수 없기에 살이 찢기는 아픔이 있더라도 한 가닥 미련조차 버려야 하리. 일상을 두고 산 정상 바위 위로 올라 가는 솔개의 심정도 그랬을까.

금빛 날개를 가졌어도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날 수 없듯, 삶도 날갯짓과 저항이 균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 청둥오리도 강한 상승기류를 타고 높디높은 히말라야를 넘는다지 않는가.

석양이 지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고택들은 강물이 실어 온 고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 굴뚝에 모라모락 피어나는 맵싸한 연기, 바람에 출렁이는 대숲, 뒤산 골짜기에서 울어대는 뻐구기 소리가 마냥 그립기도 하리라.

어느새 내 삶도 지명의 고개를 넘었다. 제법 살았고 알 만큼아니 현명하다는 내 생각은 착각인 것 같다. 사람 또한 쪼개지지않고 휘지 않도록 성품을 단련해야 음색 변화가 없는 공명상자가 되고 거기에 잘 조율된 마음의 현을 더하면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현악기가 될 것이다.

한 배에서 난 형제도 이렇게 다르다. 하물며 다른 배에서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부나 이웃, 나아가 세상 사람들은 그 얼마나 제각각 다양한 프리즘의 색깔로 살아가겠는가.

"이히 리베 디히, 아이 러브 유" 그 인사는 나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인생을 사랑해‘ 하는 것 같다.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행위는 상대를 믿기 때문이다. 아들이 배를 내미는 것은 믿음이고, 내가 아들의 배를 문질러주는 것은 믿음에 대한 인증이다. 사랑한다. 지켜주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 새가 알을 품듯 핏줄 사이의 몸짓보다 더 그윽한 언어가 어디 있을까. 거기에는 햇살보다 따뜻한 체온과 가나안의 땅보다 깊은 믿음이 흐르니까 말이다.

나는 살면서 어떤 기술을 구사했을까. 욕심을 내서 끌어치기도 하고,멀리 보고 밀어치기도 해보았다. 그래도 잘 안 되면 비틀어 치기도 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에 정신이 흐트러져 큐미스를 내기도 했다. 앞길이 불안해 점집 문을 두드려 화를 피하는 방법을 묻기도 했고, 복권 한 장에 행운을 걸기도 했다. 귀가 얇은 탓에 훈수대로 치다가 겪은 낭패야 말하기도 쑥스럽다. 상황에 맞는 기술을 부려야 하지만 다양한 기술은커녕 주특기 하나 없으니 아무래도 나는 인생의 고수는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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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옥례 지음 / 수필세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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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이자 문학치료사인 작가가 인생의 고비를 겪고 난 뒤,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담백한 문장은 내 마음을 말갛게 한다. 희망이 솟아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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