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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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최근 김성태 전 국민의 힘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인용하며 입법독재 운운하는 등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놓았다. 방송 진행자는 그 책에 입법독재라는 표현은 없다며 선을 그었다. 김성태가 그 책을 인용한 의도는 뻔하다. 12.3 내란 사태에 민주당의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 레비츠키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그가 언급하는 비민주 세력을 한국 상황에서 꼽으라면 분명히 국민의 힘이다. 그의 저서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211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난동부린 사태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1.19 서부지법 폭동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저자들은 트럼프 집권기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분명하게 후퇴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집권 3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둑이 무너지진 않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중이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책이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민주주의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 어떻게 충실한 민주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실한 민주주의자를 구별하는지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시하고 있다.

 

정당은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때 정권 교체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국민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할 때 정당은 패배를 받아들인다.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저자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계가 어려워지지 않을 것이며, 권력을 넘겨주는 정당과 그 지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위협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당이 앞으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선거 패배가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두려워할 때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해 한 정당이 비민주적 정당으로 탈바꿈한 사례는 태국의 민주당이 대표적이다. 군사독재에 오랫동안 저항해왔으며 중산층을 기반으로 둔 민주당은 2014년 군부의 계엄을 인정했다.

탁신 총리를 배출한 타이락타이당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민주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이 위협받은 상황에서 급성장했다. 탁신 총리는 집권 내내 부패 혐의를 받았으나 가난한 유권자를 위한 정책을 펼쳤고 빈곤율을 크게 떨어뜨렸다. 2005년 선거에서 타이락타이당은 6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이는 민주당 득표율의 세 배에 달한 것이었다. 민주당은 경쟁력을 상실했다. 민주당의 잇따른 선거 패배에 더하여, 교육 수준이 높고 전문직 종사자 비중이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권력과 부, 지위 균형이 점점 이동하는 흐름에 분노했다. 탁신 행정부 하에서 엘리트 집단들이 받은 압박감은 사회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2014년 선거에서 보이콧했다. 그리고 군부 쿠데타를 묵인하고 승인했다. 군부와 왕족이 가진 절대 권력에 저항했던 민주당은 군부가 이끄는 행정부에 합류했다. 민주주의가 엘리트들이 가진 권력에 도전했을 때, 엘리트를 지지 기반으로 가진 정당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 것이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반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정장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는 듯 보이고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살해됐을 때도 현장에 지문을 남기는 법이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정치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세력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 행동을 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다. 이때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려 한다.

그들은 당의 주류에 반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내쫓으려 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관여한 연합 단체와 모든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이들 단체와 협력을 중단할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공식 석상에서 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극단주의자들과 계속 협력하고 정치적 연합을 형성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연합을 형성했거나 이념적으로 가까운 단체가 관여한 상황에서도 정치적 폭력과 다양한 반민주적 행동을 확실하게 비판한다. 반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연합 단체의 폭력적이거나 빈민주적 행동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이들은 반민주적인 행동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다른 진영의 유사한 행동으로 여론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비난을 피하려고 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를 고립시키거나 물리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쟁 정당과 손을 잡는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폭넓은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정책적 목표를 내려놓는다.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는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는다. 언론은 그들을 무시한다. 그리고 정치인과 기업가, 사회적 평판을 우려하는 제도권 인사는 모두 그들과 접촉을 꺼린다. 그러나 유명 정치인들이 그들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할 때 상황은 바뀐다. 극단주의자와 그들의 이념은 이제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는다. 주류 언론 역시 다른 정치인을 두둔하듯 그들을 두둔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인터뷰나 토론에 초대한다. 그들을 외면했던 정치 컨설턴트들은 이제 그들의 전화를 받는다. 또한, 개인적으로 동조했지만 감히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던 많은 정치인과 활동가는 이제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한다.

 

민주주의를 진정 지킬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많은 장점이 있는 책이다. 저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나오게 된 역사적 사례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으며 대중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그러나 몇 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스페인 중도우파 공화당은 1934년 무장봉기에 참여한 좌파 인사들과 손을 잡았다.”(66)

스페인의 첫 번째 민주주의는 양극화와 내전이 이어지면서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주요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당들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민주주의 붕괴에 일조했다.”(68)

 

첫째, 나는 모든 폭력을 반대해야 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반민주적 행동이라는 저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공권력이 파시스트들의 백색 테러를 묵인하거나 방관하는 상황에 더하여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사람에 대한 살해 위협이 빈번하게 일어날 때,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대항력을 키우는 것과 파시스트가 행사하는 폭력을 도덕적으로 나란히 평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저자는 스페인 내전의 전초전이었던 1934년 스페인 무장봉기(아스투리아스 혁명)에서 중도 좌파 정당의 선택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의 행동의 예시로 지적하고 있으나 동의할 수 없다. 1930년대 유럽은 파시즘이 더욱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스페인 좌파들은 우익 정당의 성장이 파시즘을 스페인에서 가속화 할 것이라고 보았고 예상은 적중했다. 군부 세력은 좌파 인사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눈엣가시처럼 보였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광부들의 봉기가 당시 노동계급의 역량상 전술적으로 적절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 지점이 있을지 몰라도 무장 봉기가 스페인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비판은 납득하기 어렵다. 스페인 공화국 내 좌파 인사들이 반민주주의자였다면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자 세계 각지에서 국제 여단이 조직돼 공화군으로 합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며 의미 있는 변화는 지속적인 사회적 운동을 통해 논의 흐름을 바꾸고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힘의 균형점을 옮기는 광범위한 시민 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써 국민 청원, 집회, 행진, 파업, 피켓 시위, 보이콧 등 다양한 수단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 대중이 정치적으로 급진화할 때 저자들은 어떤 반응을 취할까.

저자는 토론종결(cloture)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토론종결을 도입한 티에르 정부의 결단을 존중하는데, 덧붙이면서 파리콤뮨, 왕당파 세력의 중간으로서 티에르 정부의 입장이 옳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코너에 몰렸을 때 좌파들은 더 나은 체제로의 이행을 바랄 것이고 우파들은 독재로의 이행을 바랄 것이다. 두 세력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때 저자들이 양극을 거부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과도한 추측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 잡기가 트럼프 행정부 및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극우 파시스트들을 방어하는 데 과연 진정한 대안인지, 그리고 민주주의의 충실한 실현으로서 과연 올바른 입장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급진화 된 민중의 힘을 의심한다. 그리고 정치적 위기 상황의 타개책으로 민중의 힘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극우들은 민중 시위가 김이 빠진 틈을 타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맛에 맞게 정부 기관들을 공격하면서 세력을 키울 것이다. 준동하는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맞불 집회와 노동자 파업이 더 자주 일어나야 한다.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다른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중 시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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