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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ㅣ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최희석 씨가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던 끝에 지난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월 21일에 주차 문제로 가해자와 엮이게 된 최 씨는 생계가 걸린 고용을 위협받았고 코뼈가 부러지도록 구타를 당했다. 세상은 사각지대에 홀로 선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임계장 이야기》는 최 씨와 같은 처지인 고령 노동자 조정진 씨가 써 내려간 노동 일지다. 그런데 ‘조 계장’이 아닌 ‘임계장’이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란다. 이들은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고다자’라고도 불린다. 연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일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단어다.
조정진 씨는 38년간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다. 2016년 퇴직 후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사무직으로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급 노동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임계장이 되었다. 햇수로 3년간 버스터미널, 아파트, 빌딩에서 배차원, 경비원, 주차요원,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노동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석면 가루, 매연, 미세 먼지를 그대로 들이마셔야만 했고 지하실에서 똥물을 퍼내고도 샤워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아파트에서 24시간 격일제로 경비원 일을 하고 받는 140만 원으로는 세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24시간 격일제인 빌딩 경비원으로도 취업해 투잡을 뛰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았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썼지만 네 곳의 일터는 번번이 임계장을 내쳤다. “수십만에 달하는 노인들이 믿기지 않는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령 노동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없다.”(8쪽)
최희석 씨처럼 아파트 주민에게 갑질도 당해봤다. 동료 경비원들은 임계장을 괴롭힌 갑질 가해자를 ‘갑질의 두목’이란 뜻에서 ‘김갑두’라 불렀다. 물론 주민 모두가 김갑두는 아니다. 임계장은 아파트 주민을 좋은 사람 소수와 무관심한 다수, 그리고 극소수의 나쁜 사람으로 나눈다. 극소수에 불과한 나쁜 사람 때문에 최희석 씨 이전에도 수많은 임계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010년에는 창원에서, 2014년에는 서울에서, 2016년에는 분당에서 김갑두의 갑질 등쌀에 못 이긴 임계장이 세상을 등졌다.
약 한 달 전 경기도 이천에서 발생한 물류창고 화재 사고 후 작가 김훈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넘어진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는가. (중략)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우리는 왜 이런가.”(한겨레, 2020.05.07.) 이 참사의 희생자도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들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날이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임시 계약직 노동자의, 얼마나 많은 임계장의 명복을 빌어야 하는 걸까.
조정진 씨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감사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보고자 쓴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259쪽) 가족을 향한 당부가 마치 독자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임계장의 노동 환경을 개선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임계장이 처한 팍팍한 현실을 알려주는 이 책을 읽고 이때까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데에서부터 작은 변화는 시작되리라. 언제까지 무관심한 다수로만 남아있을 텐가. 고인의 명복은 그만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