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기만 한 어른이 되기 싫어서 - 난치병을 딛고 톨킨의 번역가가 된 박현묵 이야기
강인식 지음 / 원더박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서 무엇을 못하는 핑계로 가장 좋은 건 '아프다' 다. 공부를 못하고 운동을 못하고 살림을 못하고 돈을 못 벌어도 '아픈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철이 없을 때, 조회 시간에 '나도 저렇게 픽픽 쓰러지면 좋을 텐데...'하고 바랬고, 너무나 완벽한 남자의 사랑과 간호를 받는 비운의 '백혈병 여인'을 상상해본 적도 있다. 심지어 애를 낳은 후 기절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첫 애를 낳자마자 간호사가 침대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내 발로 산모방으로 걸어간 사람이 나다. 아픈 걸 별로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저번에도 얘기했다시피 '편두통'이 시작되면 모든 일상이 스톱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 것도 안하는게 당연하다. 아프니까.

그런데 여기, 난치병으로 영혼까지 태워버릴 만큼 강렬한 통증을 어릴 때부터 갖고 살면서도 서울대생이 되고 톨킨의 번역가가 된 스무살 청년의 얘기가 있다. <아프기만 한 어른이 되기 싫어서>라는 제목으로, 강인식 기자의 인터뷰로 완성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과연 '아프다'가 무엇을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 박현묵군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드문 유전질환인 중증 혈우병 환자로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난치병을 앓던 소년이었다. 출생이후부터 과다한 출혈로 매번 사망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자신의 침대가 거의 세상의 전부였던 현묵이 2019년 임상 중인 신약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다. 담당의사인 김준범 교수는 그의 대입 추천서에 '박군이 보여 준 지혜와 성실함, 그리고 그의 용기는 본 추천인이 경험한 많은 인연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사례'라고 소개했다.
보통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환자들이라면 부정, 분노, 비관이 깔려있기 마련이다. 잠깐만 아파도 얼마나 우울한가? 생각이 튀어서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했다고' 또는 '재수가 없다', '박복하다'며 한탄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현묵은 달랐다. 담당의사가 현묵에게서 어두움과 절망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했다. 저자 역시 현묵의 낙천성이나 긍정적인 사고에 감탄하며 현묵은 극한의 어려움이 짓누르면 곧바로 '통'하고 다시 튀어 오르는 회복 탄력성이 대단히 높은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의 소울메이트인 엄마도 현묵에 대해 "참 뻔뻔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한다, 그래서 참 다행이고, 내 아이지만 너무 존경한다."고 하였다. 이 엄마 역시 '모계유전'인 아들의 병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대신 "현묵아, 오늘을 재밌게 살자. 오늘만 행복하자"며 아픈 아들을 데리고 나가 세상을 보여주려 애썼다. 이 집안에 절망이나 포기는 없는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내 머리 위엔 먹구름이 끼는데, 이들은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를 맞닥뜨리고 용케 견뎌냈다.

"사춘기 시절 질풍노도는 늘 침대 위에서 끝났어요. 그렇다고 해도 아프다는 것으로 나를 정의하거나, 무엇을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삼고 싶지 않아요. 내가 무엇을 못했다면 그것은 나태함 때문이에요. 장애 때문이 아니죠." 그는 아무리 아파도 고통의 중간에 틈은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현묵에게 중학교 진학은 무리였다. 대신 도서관에서 빌린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톨킨'의 세계로 입문했다. 인터넷 카페 '중간계로의 여행'을 가입하고 톨키니스트로 찐덕후가 된 현묵,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톨킨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번역해 카페에 올리기 시작했다. 내출혈로 면도날이 장기내부를 휘젓는듯한 고통에 중환자실을 밥먹듯이 오가면서도 꾸준하게 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밥먹고 화장실가고 자고... 그런 생식적인 일 이외에 그것이 아무리 쉽고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 꾸준히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력'을 필요로 한다.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넘쳐나고 기운이 팔팔해도 어렵다. 언젠가 영어책 필사나 해볼까 싶어 매일 한 쪽씩만 해보자고 마음 먹은 일도 고작 일주일이 지나니 못 할 핑계거리가 157가지나 되더라.
그런데 생사를 오가는 극강의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 어렵다는 톨킨의 번역을 10대 소년이 계속해서 한 결과, 출판사와 정식 계약한 번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니 과연 인간의 의지로 못 할 일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현묵의 사례를 '비극과 마주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요약했다. '비극 안에 양념같이 희극을 넣는,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그 비극을 역전시킬 기회를 얻는, 그런 이야기'라고. 그리하여 이 책은, '장애의 시계'가 아니라 '자신의 시계'로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쌓은 성취와 생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의 앞날엔 '아프다'가 빠지기를, 폭우가 걷히고 무지개가 떠 있는 걸 보기를,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하고, 별 빛이 흐르는 밤을 볼 때까지 그가 무사하고 행복하기를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 올리브 빛 작은 마을을 걷다
백상현 지음 / 시공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 올리브 빛 작은 마을을 걷다
백상현 지음 / 시공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를 즐겨라,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277 ˝그가 단지 그이기 때문에, 내가 단지 나이기 때문에˝ 몽테뉴가 에티엔 보에티와의 우정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너도 좋은 사람이기에 너희 둘이 운 좋게도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나보다. 새삼 깨달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과 아름다운 풍경, 감미로워지는 지중해의 공기가 떠오르고, 그 속에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데도 내 마음은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을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의 여행을 끝으로 헤어진 후 나눈 첫 전화통화에서 헤어진 연인의 감정이 느껴졌다.

내 삶의 모든 나날 동안 함께 하고픈 마음.
상대방의 무엇이라도 갖고픈 안타까운 미련.

이 책을 읽으면서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