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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으로 접했던 김영하의 작품은 소설 <퀴즈쇼>였다.
짦고 간결한 문체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 전개는 그의 책을 밤 새워가며 읽게 만들었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흰 쌀밥을 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처음엔 아무 맛도 나지 않아 밋밋하지만, 계속해서 (곱)씹어 보면 아주 달작지근한 맛이나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였고,
무엇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 셀러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그가
왜 갑자기 이 모든 혜택과 안락함을 버리고 홀연히 여행을 떠난걸까.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김영하는 아내로부터 '사이보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잘 나가는 소설가 김영하 역시 한국의 전형적인 40대 가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칠리아 섬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지금 이대로의 삶을 즐길줄 아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이 그 동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어느새 내가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돈과 명예, 권력이 주는 안이함에 빠져 어린 시절 꿈꾸던 예술가로서의 삶을
그는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빼앗겨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공간은 기형적인 치열함이 존재한다.
-촌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