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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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발레리나'로 호명당하기보다는 '발레 전공자'로서 하나의 직업군이자 사회 현상으로서의 발레에 대해 내가 관찰해 온 풍경을 나누고 싶었다.

나아가 무언가를 전공한다는 것의 보편적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 자신을 알기도 전부터 나를 만들어 온 발레. 나를 매료시킨, 나를 좌절시킨, 때론 낡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러나 모른척 뒤돌아설 수 없던 발레. 그 어지럽고도 애틋한 풍경에 대해 말하련다. 

 

 

친구 따라 발레를 시작한 저자. 친구는 곧 그만뒀지만 발레를 계속한 저자는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자는 '발레 전공자'로서 매일같이 꾸준히 노력해 초심자가 베테랑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되는 시간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가 무용 학원에 다녔었다. 우리 때는 두발자유가 아니어서 무용을 하는 학생만 머리를 마음대로 길 수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상의에 속이 비치는 스커트, 그리고 발레슈즈와 발레복이 들어간 발레슈즈가 그려진 가방을 메고 똥 머리를 하고 다녔던 그 친구가 부러웠다. 발레에 대한 내 시선은 그게 다였다. 어쩌면 그건 내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보이지 않게 노력했던 것들을 알지 못한 채 겉으로 보아온 '발레리나'에 대한 편견들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또, 무용 전공자로서 겪는 육아의 곤란함, 친정어머니 없는 무용수의 힘듦, 발레의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 유색인 무용수에 대한 차별들, 비싼 레슨비와 가격에 비해 빨리 망가지는 슈즈, 다이어트, 어려운 취업 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낯선 직업 '발레리나'에 대해 조금은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강한 작가님의 삽화에 눈 호강도 했다.

발레단이 가장 나태해질 수 있는 작품은 <호두까기 인형>이다. 나태함이라니 얼마나 발레와 어울리지 않는가. 평소의 공연은 몇 달을 연습하고도 기껏해야 일주일 안팎으로 마무리되니 늘 아쉽다. 하지만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연말이면 두어 달을 매일같이 공연하는 데다 테크닉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으니 나태함이 스며들기 쉽다.

그럴 때마다 단장님은 무용수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하시곤 했다. "여러분은 어제도, 그제도, 몇 주 동안 해 온 작품이지만 오늘 올 관객 중에는 발레를 난생처음 보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니 초심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주세요."

프로의 정신은 너무 떨거나,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쉽사리 나태해지지 않으면서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연장이 아니면,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발레리나'의 이야기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간동안 끝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시간을 겪어내는 한 사람의 모습에서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생의 닮은 점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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