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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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한국어의 향연.
그 향기로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원래도 한국어를 참 사랑한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언어를 100% 아름답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신의 뇌를 죽을 때까지 3%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애통함과 비슷할 것이다. 
비록 내가 그렇게 사용하지 못할지라도  한국어를 수려하게 구사하시는 분의 글만 읽어도 그저 황홀한 걸...

드디어 싱이통에 쿨럭거리면서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 촉수가 내 구두코에 와 닿는다. 
이제 나는 깅이통에 작별을 고한다. 
어려운 시간이 왔구나, 잘 견디거라, 잘 쉬거라, 작고 아름다운 것들아. 물속 깊이 잠겨, 눈도 감고, 입도 오므릭, 숨도 죽이고, 잘 쉬거라, 잘 견디거라, 작고 아름다운 것들아.p58


#1.
현기영 선생님(?)이란 분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미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한국의 문단에서는 매우 유명하신 분인것같은데 한국소설을 즐겨읽지 않는지라... 
참 아이러니다. 한국어를 좋아하는데 한국 소설을 즐겨읽지 않아.
한국소설에 강하게 나타나는 '한'의 정서를 나는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지금까지 피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우울한 역사를 배경하는 소설들을 특히나 더.
지금 뉴스도 애써 피하고 있는데, 이야기라는 색깔까지 덧입혀진 소설을 읽는다면 그 한의 정서에 빠져서 몇날 며칠 정신을 못차릴 것 같아서 시작도 못하고 있는 한국문학.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준비가 된 것 같지 않다.
현기영 선생님이 쓰신 소설들도 나라의 슬픔을 근간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본인이 직접 겪으신 본인 고향의 4.3항쟁을 배경으로 그려낸 소설들은 발간되면서 너무 끔찍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나보더라.
그때의 공포를 너무 리얼하게 그려내서...
'순이 삼촌'을 쓸 때의 내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4.3 사건을 말하지 않고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었다.
.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군사독재는 물러나고, 그에 따라 그 사건의 금기의 음습한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4.3의 글쓰기도 조금은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
너무도 끔찍한 참상이어서 그것을 리얼하게 재현한 작품은 독자에게 공포를 일으키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외면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공포는 연민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참혹함에서 한 발찍 물러난 작품, 즉 공포보다는 연민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  글 쓰는 자는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확신을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생겼다. P73,74
#2.
역사란 것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역사가 아니라 그냥 어떠한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겠지.
나이가 있으신 아는 분에게 4.3사건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봤다.
(부끄럽지만 나는 한국 근현대사는 정말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과 비례해서 아는 정보가 거의 없다. 중학교 국사시간이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다 너무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수업시간에 눈물을 흘린 후론 아예 일부러 더 듣지 않으려고 들은 것도 기억에서 잊으려고 더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니 단번에 나오는 단어가 '아! 4.3폭동?'
폭동... 
누구에게는 항쟁이고 누구에게는 폭동이다. 
이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아이덴티티가 하나의 사건에 붙여져 있다.
#3.
중간에 오에 겐자부로의 일화가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모임이었는데, 프랑스가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행한 핵실험에 반대해서 오에 겐자부로가 프랑스 주최의 한 모임에 불참했단다. 그랬더니 장 클로드 시몽이라는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를 비판하며 원폭지지 발언과,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동아시아 점령을 비난했단다. 인류 평화와 복리를 위해 제정된 노벨상 수상자가 말야. 지금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인 '금융으로 본 세계사'에서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어떠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했는지를 보고 있었는데, 이것 또한 아이러니일세...그래서 관련 기사를 찾으며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다시 꺼내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92200329106005&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09-22&officeId=00032&pageNo=6&printNo=15546&publishType=00010
식민지개척 이후에 있었던 2차대전이 수채화 위에 페인트를 얹어 그림을 바꿔버린 느낌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변모하며 동시에 영웅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들이 한둘뿐이랴. 국가란 것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변되는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양상은 개개인이 소수로 모인 어떠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양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는 정의를 원해! 나는 정의롭게 살거야! 라고 평안한 가운데서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글쎄, 사실 인간속의 본성, 인간이라고 치환할 것도 없다. 내 속의 본성은 그저 나 하나 안위하기 원하고 나 하나 우위를 선점하고픈 뿌리깊은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나이가 들고 허세가 걷히면서 아주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4
사람은 원래 자신이 워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려는 이기적 성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즈음 인터넷에 중구난방으로 난무하는 '나만의 진실'들은 너무도 황당하다.
근거 없는 뜬소문, 저질의 정보, 날조된 정보 따위나 실어 나르면서, '나는 옳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p107
부연 설명 불필요.
#5
예컨대 우리는 즐거움만 좋아하다보니 진정한 슬픔을 잊어버렸다. 진정한 슬픔을 오히려 싫어하고 두려워한다.p250
선생님;; 저를 아십니까;;????
티브이의 홈드라마가 제공하는 가짜 슬픔에나 눈물을 찔끔거릴 뿐이다. 그런 눈물에는 영혼도 없고 소금기도 없고 아무 뜻도 없다. 슬픔이 없어졌다. 슬픔을 아는 자가 진짜 인간일 텐데, 우리는 더 이상 슬픔을 모른다. 초상집에도 슬픔은 없다. 시인들에게조차도 슬픔은 없다. p250
요즘 잠깐 중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드는 생각이다. 
이 아이들 건강한 감정을 모른다. 자신의 권리라고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이 타인에 의해 침범당하면 매우 쉽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성적이고 현명한 세상살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네들보다 불과 십여넌 남짓 조금 더 살았지만서도 내 중학교 시절을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우리반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anxiety. 나도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텐데 감정을 아는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답은 알고 있지만 이 환경 이 세태속에서 본이 되는 어른이 되기란 참 쉽지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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