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보통 한국어로 알고 사용하는 많은 언어들이 일본 근대기에 서양어의 일본어 번역어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유, 근대 뭐 이런 말들은 어떻게 서양어의 번역어로 선택되었고 또 그 원의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을까?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2003, 일빛)은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그녀 같은 말들이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일 때 어떤 과정 속에서 어떤 지적 고민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끌어왔는가를 잘 보여준다

'자연'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들은 '자연스럽다'는 말과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전자의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노자 도덕경에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던 바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후자의 자연은 서양의 Nature와 같은 의미로 인위적인 것과 대비되는 산과 강, 들 같은 것을 가리킨다.

어떻게 과거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를같던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로 선택되게 되었을까? 야나부 아키라는 구조주의적인 방법으로 그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Na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한자어 자연이라는 말이 그 후 어떤 의미를 가지면서 발전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스럽다도 자연도 아닌 새로운 의미와 조우하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카세트 효과라는 것이다. 카세트는 보석함을 말한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것이 보석함이다. 자연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우연적으로 선택되었지만 일단 선택되고 카세트 효과를 갖는다.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말을 유행시킨다. 뭔지는 몰라도 새로운 것이 아닌가! 거기엔 뭔가가 있다! 그러면서 Nature의 의미를 포함하는 새로운 자연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야나부 아키라는 이 책에서 번역의 원칙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근대에 만들어진 번역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서된 문어인 번역어가 지배종속, 계급 따위의 이미지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음도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까? 끊임없이 외국의 문물과 소통해야 하며, 따라서 번역어를 만들어야 하는 우리는 이 책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야나부 아키라의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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