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 근대의 시작 - 동학의 길을 걸으며 한국사를 성찰하다
김인호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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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근대의 시작』은 1860년에 우리나라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담고 있다(이렇게 판단한 이후는 뒤에 살펴보겠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했다. 1부에서는 동학이 태동하는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했다. 2부에서는 동학혁명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중의 열망이 화산처럼 폭발하던 장소를 톺아보았다. 3부에서는 고창, 장흥, 하동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을 간지핀 내용이 중심이다. 3부 뒤에는 마지막으로 저자의 생각을 요약한 ‘닫는 글’이 실려 있다. 이런 짜임새는 “동학 역사 기행”의 특장(特長)을 드러내는 데 썩 적합해 보인다.

저자 김인호는 이 책에서 동학에 대해 몇 가지 통찰을 발휘한다. 그 통찰은 이제껏 다른 이들이 말하지 않은 인식을 담고 있다. “동학은 성리학의 500년 전통 속에서 솟아올라 그 전통의 원리로 봉건체제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384쪽) 했다는 진술이 주목된다. 이것은 개인을 사회와 분리시켜 인식했던 ‘닫힌 사고’를 ‘열린 사고’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값지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다 물방울이다. 물방울들이 합해져서, 혹은 합해져야 흐름을 이룬다. 피아노 연주를 떠올려 보라. 건반은 저마다 고유한 음계를 지닌다. 하지만 건반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는 음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 누른 건반의 음계가 유지되는 동안 두 번째로 건반의 음계가 이어지고, 두 번째 음계는 세 번째 음계와 섞일 때 음악이 완성된다. 김인호는 개인과 동학을 역사의 흐름 위에서 정좌(正坐)케 하는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동학이 일어나던 무렵의 조선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삼정 문란과 악습의 화농균에 전신이 감염되어 가쁜 숨을 겨우 헐떡이고 있었다. 병든 사회의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 몫이었다. 백성은 신분 차별과 부정부패에 짓밟히면서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동학은 이런 무기력을 깨트리려는 주체적인 약동이었다. 김인호는 동학혁명을 “민중 자신이 민중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고 민중 자신이 민중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킨 운동”(108쪽)이었다고 명토 박는다. 나는 이 문장이 이 책 전체의 알짬이라고 생각한다. 김인호는 동학의 본질을 꿰뚫는 인식에다 ‘민중 자신’을 반복하는 대구 형식까지 갖춘 문장으로 이 책의 핵(核)을 삼았다. 동학은 ‘백성’이 ‘민중’으로, 구경꾼이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봉준은 하녀들의 신분을 해방시킨 후 각각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다. 이것은 동학혁명이 바라보는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확증(確證)한다.

저자는 동학이 “경주에서 일어나 호남에서 혁명의 불길로 치솟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 3·1 운동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나다가 6·10 만세운동(1926), 신간회 운동(1927)을 주도했으나 1929년부터 지하로 숨어들거나 보천교 등 유사종교에 몸을 숨기면서 쇠락했다”(116쪽)라고 이르집는다. 1860년 경주에 살던 최제우가 도통(道通)하는 데서 동학이 시작되었다. 저자는 동학이 근대의 기점이라고 본다. 제목 『1860, 근대의 시작』은 이런 생각을 압축한 표현이다. 이 책은 그 이후 동학혁명군의 주요 인물의 사상과 활동을 가지런하게 펼쳐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동학의 전개 과정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제1대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시천주(侍天主)

영남 남인의 후예.

시천주(侍天主): 모든 사람은 같은 하늘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평등하다.

『동경대전』(1880): 한자 경전.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용담유사』(1881): 한글 포교 가사집.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몽중노소문답가, 도수가, 권학가, 도덕가, 흥비가, 검결

제2대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양천주(養天主)

천지부모(天地父母), 이천식천(以天食天), 유무상자(有無相資), 향아설위(向我設位)

전봉준(1855~1895): 남접 지도자, 동도대장(東徒大將)

호남 좌도: 김개남(1853~1895, 총관령), 김인배(1870~1894) - 과격

호남 우도: 손화중(1861~1895, 총관령), 김덕명(1845~1895) - 온건

이필제(1825~1871): 영해 봉기 주도

제3대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인내천(人乃天)

남접 지도자. 1905년 천도교 창시. 1910년 기미독립선언서 민족 대표

이렇게만 놓고 보면 이 책은 다른 저작물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1860, 근대의 시작』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겹치는 지점에서 빛난다. 투박하게 말해서 이 책은 문사철(文史哲)의 삼중주(三重奏)다. 이 삼중주가 빚어내는 화음은 아름답다.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독자를 동학이 배경인 문학작품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뒤를 따르다 보면 이미 읽은 작품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미처 읽지 않은 작품은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동학혁명의 현장을 답사한 글품으로 더욱 탄탄하다. 저자는 원주에서 김지하의 『이 가문 날의 비구름』을 비판하고, 정읍에서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과 송기숙의 『녹두장군』을, 고창에서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분석하고, 하동에서 박경리의 『토지』를 상찬(賞讚)한다. 김지하는 영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에 빠져들면서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박태원은 민중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었지만, 동학의 사상에 바짝 다가서지 못한 채 유사종교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송기숙 역시 시천주에서 사인여천을 거쳐 인내천에 이르는 과정을 놓치고 인내천을 앞세움으로써 동학 그 자체를 일그러뜨렸다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동학이 인간이 하늘을 모시고[최제우], 키우던[최시형] 상태에서 인간이 하늘이라는[손병희] 오만함으로 변질된 전개 과정을 지적하는 사유와 연결된다. 서정주는 동학을 부정하고 김성수 일가를 찬양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 한계였다. 동학의 근대성을 제대로 인식한 작가는 박경리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저자가 이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동학의 본질을 얼마나 제대로 드러냈는가 하는 점이다. 김인호는 동학을 파레시아(parrhesia)로 보았다. 파레시아는 “정치적 장에서 자기 자신의 의견을 목숨을 걸고 말하는 것”(188쪽)을 의미한다. 파레시아는 ‘진실성, 위험, 의무, 자유, 수용성’이 본질이다. 동학에서 이런 본질적 요소를 찾아내는 김인호의 눈빛은 형형(炯炯)하다. 동학혁명은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고부, 무장, 황룡촌, 석대들, 영해, 우금치에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함성이었다. 동학혁명군은 관군과만 싸운 게 아니다. 동학혁명군은 유림과만 싸운 게 아니다. 동학혁명군은 일본군과만 싸운 게 아니다. 동학혁명군은 관군, 유림, 일본군 모두와 싸웠다. 동학혁명은 죽을 걸 알면서도 전투에 나섰던 이들의 목소리였다. 이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올바르게 형상화했는가가 저자가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다. 문학과 역사를 버무린 책은 자칫하면 문학도 아니고 역사도 아닌 어정쩡한 얼치기가 되기 십상이다. 『1860, 근대의 시작』은 문학과 역사, 철학,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 세 요소가 단단히 결박되어 논지를 이끌어 간다. 공부를 충분히 한 저술가는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한다. 그게 이 책의 정체성이다.

동학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지나 미래와 연결된다. 이는 저자가 동학을 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집단이 과거의 정신에 기대어 하나로 융합될 때, 앞으로 구현해야 할 이상을 마련하게 되고, 새롭게 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253쪽). ‘현재화된 동학’은 이 책의 또 다른 성과다. 저자는 최시형에서 장일순(1928~1994), 김지하(1941~2022)로 이어지는 원주를 주목한다. 그 덕택에 「관동별곡」의 섬강과 치악으로만 인식되던 원주는 생명운동, 협동조합운동, 지역 공동체 운동이 약동하는 현장이 되었다. 김인호의 목소리는 원주가 고향인 나보다도 훨씬 더 원주에 밀착되어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원주, 공주, 고창, 정읍 사람 중에서 이 책으로 그 지역을 다시 인식하게 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각 지역의 산과 강, 고개와 언덕에 얽힌 역사성을 재확인하고, 거기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를 여는 즐거움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민중 자신이 민중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고 민중 자신이 민중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킨 운동 - P108

경주에서 일어나 호남에서 혁명의 불길로 치솟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 3·1 운동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나다가 6·10 만세운동(1926), 신간회 운동(1927)을 주도했으나 1929년부터 지하로 숨어들거나 보천교 등 유사종교에 몸을 숨기면서 쇠락했다 - P116

현재의 집단이 과거의 정신에 기대어 하나로 융합될 때, 앞으로 구현해야 할 이상을 마련하게 되고, 새롭게 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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