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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문득 소설이 읽고 싶어져 어떤 소설이나 소설가가 좋을지 찾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니, 소설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도 낯설지 않을 수 있겠다.
여기서 다루는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가와카미 미에코라는 작가가 하루키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하루키의 작품은 물론 하루키라는 사람을 매우 좋아하는데,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던 중 하루키란 이름을 보고 이 책을 펼쳐보니 제법 두툼한 내용이 전부 하루키에 대한 인터뷰였다. 하루키를 좀 더 알 수 있겠다는 기대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거지만, 여러모로 지금 내게 너무나 적절한 책이었다. 조용히 날 지켜보던 친구가 나도 막연하게만 필요하다고 느끼던 것을 선물해 준 것 같았다. 소설가이자 하루키의 열혈 팬인 미에코가 인터뷰를 진행하여 이 책에는 하루키와 그의 작품에 관한 풍성한 정보가 담겨있지만, 여기서는 하루키가 말하는 글쓰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이 책이 소설 쓰기에 관한 하루키의 생각이 집약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출판된 뒤에 진행한 인터뷰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 리뷰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사람에게는 책을 읽으며 들었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설 쓰기, 나아가 글쓰기에 관한 하루키의 여러 조언을 접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서퍼가 앞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하루키는 소설을 어떻게 쓸까? 많은 사람이, 특히 소설을 쓰거나 쓰고 싶은 사람이 하루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당연히 하루키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소설가 미에코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 주제와 관련된 질문에 하루키는 한결같이 대답한다. 등장인물과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됩니다. 대가의 비법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맥빠지고 다소 황당한 답변일 수 있다. 그러나 일관되게 이야기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미에코가 어떤 인물이나 장면의 의미에 관해 물으니 "갑자기 머릿 속에 떠오른 거에요"(p23) 혹은 "그 전후관계가 실은 이런 의미다" 따위는 전혀 없어요. 이야기는 작가조차도 "해석이 불가능하니까 이야기"(p.123)라고 답하는 하루키의 모습을 보면, 그가 자신의 비법을 들키지 않으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솔직하고 세속적 명예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하루키는 애초에 그런 거짓말을 떠올리지도 않았을 거 같지만.
하루키는 스피리추얼리스트, 한국말로 하면 신내림을 받은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을 사람과 소설가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하늘의 뜻'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과 유사하게, 소설가도 자신의 문장을 통해 자신에게 '떠오른' 등장인물과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버리니까"(p.122), 소설을 쓸 때 생각하려 들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하루키의 관점에서 소설을 쓸 때 중요한 것은, 이 등장인물을 어떤 인물로 그려야 할까?,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시키는 게 좋을까?,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 사건과 전체 이야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등에 관한 고민이 아니다. 이보다는 작가의 머리 속에서 실제 사람처럼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는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와 사건, 그리고 이 대화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나 상황 등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단편 소설과 달리 장편 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할 구체적인 실마리가 없으면 이야기가 커지지 않는다고 말하긴 하지만, 하루키가 볼 때 단편 소설이든 장편 소설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자발적인 움직임"(p.85)이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은 어찌보면 그 자연스러운 발열을 찾아가는 작업"(p.86)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루키에게 소설 쓰기의 관건은 이야기가 자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이기에, 하루키에게는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는 작업 자체가 중요하다. "일단 한 덩어리의 글을 써놓고, 조금씩 손대며 고쳐나가고, 그사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자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81) 걸 기다린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또한, 이야기가 스스로 나아가기 때문에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쓸 때 "'좋아 해보는 거야!'가 아니라 '뭐, 한 번 해볼까' 에 가깝게 가벼운 기분으로 시험 삼아 써보면서 시작하고, 초고는 "어쨌거나 문장의 위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니까 되도록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p.47) 고쳐 쓰고, 일 년 반에서 일 년 반, 이 년 정도의 시간이 드는 장편소설 쓰기를 해내려면 "무엇인가와 싸운다는 굳은 각오"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만약 여기서 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하냐는 미에코의 질문에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400자 원고지 두 장 반쯤 할애할 부분이다 싶으면 그만큼을 일단 묘사로 채우는 거죠. 뭐가 됐건 간에 필요한 분량을 글자로 메워둬요. 훌륭한 문장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고쳐 쓰면서 필요에 따라 깎아내거나, 부풀리거나, 세부를 공들여 묘사하거나, 아름다운 친절을 발휘하거나, 근사한 비유를 집어넣으면 되니까요."(291-292) 많이 고쳐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가령 『기사단장 죽이기』의 경우 여섯 달에 걸쳐 수정본을 여섯 번이나 만든 후에 정식 교정이 시작될 정도로 고쳐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하루키이지만, 소설 초고를 쓸 때의 하루키는 자발적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중시하고 따라가는데 몰두한다.
#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소설이 작가의 머리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문자로 구현한 것이라면, 소설가는 그저 자신의 내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머리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얼마나 구현할 수 있는지, 특히 독자에게 그려낼 수 있는지가 문체에 달려있다고 본다. 많은 작가가 "발상이나 장치를 앞세우고 그뒤에 문장을 가져"오지만, 자신이 볼 때는 가장 먼저 문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문체를 강조하는 하루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저는 이래저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프로로 소설을 써왔는데, 그래서 그동안 무얼 했는가 하면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토리에 맞춰 글을 써가지만, 그때는 다른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리시브할 뿐이에요. 그러나 문체는 다른 쪽에서 와주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준비해야죠. 그리고 날마다 진화해야 합니다."(p.127)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p.198) 그렇다. 소설이 문장를 통해 작가 내면에서 스스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면, 소설가가 준비해야 하는 일은 이 잉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를 다양하게 준비하고 성실하게 관리하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하루키는 "늘 문장을 생각하고, 늘 어떤 문장을 쓰고 있고, 늘 여러 가지를 조금씩 시험해"본다고 한다(p.201).
그렇다면 하루키가 생각하는 좋은 문장이란 무엇일까? 하루키가 독자를 졸지 않게 만드는 요령으로 제시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주고받는 구조를 만들어 문장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령,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라는 문장 대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 귀머거리 아니야"라는 주고받는 문장을 써서 역동성을 만들라는 것이다. 둘째, 독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잠 못 드는 밤은 드물다"라고 적는 대신,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 배달부만큼 드물다"라고 적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독자가 간단히 읽고 넘어갈 문장을 쓰지 않"(p.228)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독자가 소설의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들라는 말일 것이다. 하루키가 "말의 울림"(p.234), "문장의 리듬"(p.47), 충분히 채워진 기억의 캐비닛, 책의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느낌, 그리고 자연스러운 비유를 강조하는 것도 이 요소들이 독자가 소설 속 이야기에 느끼는 흥미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일"
여기까지 글을 읽은 분이라면, 소설 쓰기의 관건이 등장인물과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하루키의 말에 느꼈을 실망과 당황스러움이 조금은 가셨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찝찝한 느낌이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자신에게 떠오른 등장인물 혹은 자신이 쓰고 싶은 등장인물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고 말하는데, 과연 정말 그러할지, 정말 그렇다면 왜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지 못한 많은 소설과 달리 많은 나라에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것인지 등 하루키가 자신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처럼 말하는 이야기에 관한 의문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지하 2층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는 하루키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하 2층의 이야기는 작가의 의식 아래에 있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작가가 인식할 수는 있으니, 지하 2층의 이야기는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정도가 낮은 의식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의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의 이면에 해당하고, 지하의 각 층은 그 정도에 따라, 다시 말해 개인의 의식과 사회의 인식에 의해 배제되는 정도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루키가 말하는 등장인물이 자발적으로 전개하는 이야기란 하루키의 의식과 하루키의 무의식에 가까운 의식이 조우할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에게 떠오른 등장인물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포착하여 문장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하루키 본인도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비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이 펼쳐지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비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키, 나아가 하루키에게 열광하는 수많은 독자가 이러한 인물과 사건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이유는, 하루키 소설의 비현실적인 요소가 의식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의식, 즉 현실에서 배제되거나 어렴풋하게만 느낄 수 있는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하루키 본인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이른바 사소설 작가들이 쓰는, 일상적인 자아의 갈등 같은 것은 별로 읽고 싶지 않아요. 자신의 그런 부분도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요. 물론 저 역시 무슨 일이 있으면 화를 내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불쾌함을 느끼거나, 고민하거나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그보다 자기 안의 고유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밖으로 끄집어낸 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쪽이 훨씬 흥미롭죠."(p.40) 게다가 "자아 레벨, 지상 의식 레벨에서는 대개 보이스의 호응이 얕아요. 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면 언뜻 똑같아 보여도 배음의 깊이가 다르죠.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 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p.41)
이처럼 지하 2층의 이야기는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 때문에, 하루키가 이 이야기와 깊이 있게 관계를 맺는 일,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담력과 시간, 그리고 이 고된 일을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하 2층에서 지녀야 하는 분별력을 언급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키는 의식상의 세계와 의식하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지하 2층의 "어둠 속에서 무엇을 붙들어도 되고 무엇을 붙을면 안 되는지 대강" 알고 있고(p.101), 이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루키가 볼 때 사람들의 (무)의식을 사로잡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악한 이야기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자극하여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독자가 작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선한 이야기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바꿀 수 있는 끈질긴 힘을 지니고, 독자가 주인공을 신뢰하여 '좀 희한한 이야기'도 따라가게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선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의 토양이자 기반"이고(p.351), "신화나 역사의 무게 자체가 무효"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p.352).
# 감상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몇 가지 감상을 적으며 이 글을 마무리 하겠다.
먼저 이 책은 블로그를 막 시작한 내가 유념해야 할 점을 딱 짚어 주었다.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면, 내 글에 나만의 고유한 관점이 있어야 하고, 내 글을 계속 읽게 만드는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 쓰기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충분한 시간과 체력을 마련하고 기억의 캐비닛을 다양하게 채우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이야기 거리가 등장하고 전개되는 것을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것과, 이 이야기를 충실하고 생생하게 문장으로 옮기되 이 번역 과정에서 독자의 흥미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하루키가 자신만의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노력 모두를 강조하고 있지만, 하루키와 달리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훈련이 아직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현상에 관한 나만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관점을 가지는 태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바라볼 때는 참 멋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내 것으로 만들기는 참 어렵다. 하루키의 말처럼 내 내면의 목소리를 충분히 경청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충분해야 하기도 하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가 보잘 것 없거나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지니고 지키기가 어렵고, 이 무형의 목소리를 말과 글처럼 형체를 지닌 것으로 충분히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인 것 같다.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주는 것, 인간관계에서 똑부러지고 당차보이는 것 등과 같은 편협한 기준으로 내 생각을 끊임없이 평가받다 보니 그런 것 같지만, 이유가 뭐든지 간에 나조차 내 '고유한' 생각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생각을 구체화하고 확장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제부터라도 초고를 쓸 때 멋진 표현, 이야기의 정합성 등은 잠시 제쳐두고 내면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집중하는 하루키처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설령 엉성하고 별 가치가 없어 보이더라도 일단 내면의 목소리에 충분히 집중하고 거칠게라도 이 무형의 목소리를 형체를 지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또한, 내면의 다양한 내가 충분히 말하고, 내가 이 여러 '나'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 이 여유를 지니는 데 관건인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부지런히 구축해야겠다.
한편, 소설에서 문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하루키의 말은 블로그를 하며 느끼던 내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꼬집는 것 같았다. 하루키의 관점은 글의 내용보다 글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글의 완성도가 독자가 글로부터 받는 인상을 좌지우지할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글의 완성도는 독자가 글을 읽고 받는 느낌에 달려있는 것 같다. 아무리 좋은 글일지라도, 독자가 첫 문장을 읽고 흥미를 잃거나 반감을 느껴 더 이상 읽지 않는다면 이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그 뒤에 재미나 통찰이 잔뜩 담겨 있다하더라도, 이 글은 한 문장만 읽힌 글에 불과할 뿐이다. 하루키가 소설의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중요시 하고 독자의 정신을 번쩍 만드는 문장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도 구슬이 서말이라도 잘 꿰어야 보배가 되고, 구슬을 꿰는 사람이 독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의 내용보다 글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 블로그를 시작한 이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내가 독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블로그를 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무미건조한 학문적 언어에 길들여진 내 글이 딱딱하고 재미없게 느껴질 것 같다. 더불어, 눈으로 글자의 리듬을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쓰라고 말하는 하루키가 내 글을 본다면 반복되는 단조로운 리듬에 잠들어 버리지 않을까 싶다. 이 깨달음이 여러 독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다양한 독자의 흥미와 관심사를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문체를 만드는 노력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제 네이버 블로그도 한 번 놀러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keep_selfs_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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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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