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교회가온다
#잉클리즈
< 위임과 질문 >
몇 년전 몇몇 교회에서 교회 집사들이 돌아가면서 주일예배설교를 하는 경우를 보았었다.
학생회나 청년들 설교가 아닌 주일 강대상에 집사가 서서 설교하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충격을 받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자격’이다.
‘자격’이 있나?라는 질문
‘보수’적인 신앙환경에서 자란 나에게는 규칙이 깨어지는 상황을 마주할때,
규칙을 보호 해야지 싶은 마음과 더불어 신선함과 불안함 그 중간 어느 즈음에 드는 마음이 같이 싸운다.
‘자격’은 진입장벽을 높여 자신의 권위를 체계를 통해 보호하기 위함이다.
어떤 공부를 해야 집사되고, 어떤 봉사를 해야 권사된다.등등 말이다.
(다만, 해당인원이 너무많아 수를 제한해야하는 경우 였을것이라고 믿는다.)
1. ’자격’을 주는이들과 ‘자격’을 나누는 일은 이유합당하고 효율적이므로 공동체에서는 중요하다.
‘아무나’ 말씀을 전해 서는 안된다 라는 글에서 ‘아무나’는 선동하는 자들이나,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히려 ‘누구나 같은 아무나’ 말씀을 해석하여야 그 ‘아무나’가 등장 하지 않는것 임을 알게되었다.
선교단체 책임간사님과 이야기 나누다가 물었다. 성경 공부의 수준은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 되는지 말이다.
우리 때(라떼)와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 나누다 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기도 할뿐입니다.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나누면서 온전하게 전해 지 길 기도 할 뿐입니다라는 말에 은혜를 누렸다.
성경해석의 오남용이 두렵다기 보다는 권한의 위임으로 인해 자신의 권한이 줄어드는 것이 더 두려울텐데, 위임하여 흥왕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책임간사님을 다시 보게되었다.
2. ’1세기 교회’에 대한 회복을 많이들 말하고 나눈다.
말씀을 읽고 ‘질문하는 자’는 성도 각자각자여야 한다. ‘해석하는 자’도 각자여야 하며 ‘질문하는 자도’
각자여야 한다. 다만 성도는 어떤 두려움이 있다.
내가 해석을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 틀리면 어떻게 하나라는 마음이 자리잡혀있다.
틀려도 괜찮고, 틀린 해석이라는 것은 거의 없어 라고 말해주는 이가 필요하다.
(거의라는 단어의 명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3. 평신도 교회라는 말에 반감이 아주 없었다면 거짓일것이다.
목회자의 부재가 가지는 유익보다 부재의 여가치가 크다는데 여전히 동의한다.
평신도교회의 출발은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목회자의 부재에서 출발한것이라고 느껴진다.
예의를 갖춘 질문의 한계란 없어야 하며, 거기에서 신앙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왔다.
평신도교회의 출발은 ‘질문받아주는 이의 부재’라고 내게 다가왔다.
4. 말씀선포의 첫번째 청중은 선포자 본인이라는 사실을 많은이들이 잊는것 아닐까?
P51_설교자가 자신을 말씀에 적용받아야 할 첫 번째 청중으로 보지 않는다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타인을_움직이기위해 말씀을 오용하기가 쉽습니다.
목적없는 설교가 있으랴만은 목적이 본질을 흔들어 대는 경우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
평생을 이곳저곳에서 가르쳐온 나는 틀리는 것의 두려움을 키우기도, 줄이기도 해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것은 좋은 선생의 역할이다.
5. 그 역할의 첫 번째는 틀린 해석을 들어주는 것이다.
(틀린 해석이라는 것이 기준이 존재하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점점 더 다른 해석, 각자의 해석이라고 받아들여주고, 배경은 이런것이야 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선생이 필요하다.
P95 교회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해석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만 지배하는 상황을 거절하는것입니다.
거절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적 시각을 거절한다는 것뿐 아니라 개개인의 작은 의견도 소중히 받아들여 주는것이다.
6. 평신도 교회의 핵심은 성도 각자가 성경을 읽어야하고 해석하고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별이 없는 것이 개혁교회의 커다란 개혁의제였을텐데, 제일 중요한 말씀을 각자가 읽지 않고
해석하고 질문하지 않으니, 점점 몇몇의 해석에 기대고 따르는 쉬운(?)길을 택해가며 한국 기독교는 줄어들고 있다.
각자의 질문을 소중히 여겨주는 공동체라면 생명력이 있지 않겠나
지난주 설교의 제목과 본문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퍼센트나 될까?
좀더 깊이 물어보면 지난주 설교의 키포인트를 2가지 이상 말할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지난주 설교를 리뷰하고 시작한다면 어떨까?
교제시간에 설교 원고를 나눠주고 나누게하면 어떨까?
7.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지켜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체성을 지킬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부어 주십니다.(p41)
생명은 태어난 후에야 자신이 누구인지 묻습니다.(머릿말)
누군가에게 나의 정체성을 규정지음 받는다는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8. 저자는 ‘좋은교사’운동 ‘사교육걱정없는세상’등 교육운동을 하는 운동가입니다. 동네 아저씨로 사교육을 하는 저는 어쩌면 배척과 개혁의 대상이 되겠네요. 그러나 지은이의 말에 많은 공감을 하는것은 부인할수 없습니다.
사교육은 없는것이 맞지요. 교회는 목회자중심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가진이들의 공동체임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모든것을 공감할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매우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깨닫고 생각하게 해줄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불편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자 없는 교회가 아니라 올바른 교회공동체를 위한 고민임을 안다면
적용점이 많을것 같아요.
예를들면 기관별 목회자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나눠주거나(분립이 아니라도 말이다.) 성도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치게 하는 의무를 부여하기등등 그러나 부교역자일때와 담임목회자일때의 관점은 달라 지고, 달라져야하고, 달라질수밖에 없으니 쉽지는 않겠네요.
9. 성도들의 교회가 문제가 없을것이라는 것은 당연 아니지요. 문제도 많아지고 말도 많아지고, 의사결정의 효율성이 떨어져 보이지요. 교회는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각자 다른 의견을 펼치고 나누는 곳임을 기억해야할것입니다.
10. 효율성은 떨어지고 다른 의견으로 마음이 상하기도 하겠지만, 그 것을 넘어서야 모두의 공동체가 될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책을 통해 평상시라면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유익을 누리시길 소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