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 지음, 말로타 그림, 최이슬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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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강남역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때 20대 초반의 수많은 어린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나는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 구호를 외치며 성별로 인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하는 육아라는 낯선 삶에 적응하느라 뉴스들을 거의 못보고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여성주의자들은 유별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남성의 삶이 더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온 것은 일과 육아와 가사 등 엄마라는 꼬리표가 붙은 일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다. 매일 12시 1시까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24개월 넘어서까지 새벽에 한 두번씩 깨는 아들을 돌보며 다크써클은 한없이 내려오고 내 신체는 활기를 잃은 채 진이 빠지고 있었다. 나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일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어느새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고, 언제나 다툼은 이혼직전까지 갔다.

불타는 사명감도, 연대의식도 아닌 나는 내 몸이 죽을만큼 힘들었을 때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원망하다 페미니즘을 접하게 됐다. 좋게 말하면 절박했던 거고, 툭 까놓고 말하면 내 필요에 의해서였다. 우리 부부가 싸우고 내가 힘든게 남편이 나빠서도 아니고, 내가 유별나서도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뿌리박힌 성별간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한다. 누군가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고 있다는 것은 짐짓 모른체하고.

그때는 내 생활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뭔지 모를 부당함과 억울함, 억하심정에 대해 풀어줄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페미니즘이다 정도였다. 이건 아닌데 싶지만 그게 왜 그런지 자신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는 페미니즘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심화주제로 가는 길목을 안내한다. 저자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가 소개하는 고전들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책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페미니즘의 세계로 안내한 책들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이정표가 됐던 순간들을 책과 함께 소개한다. 유년시절, 예쁘게 치마를 차려입고 얌전히 인형놀이를 하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말괄량이 자유분방 소녀 삐삐에게 끌린다. 청소년 시절, 신체의 변화와 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날 때 남성의 시선으로 정의된 여성의 신체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분개한 나는 엄마에게 나의 생식기 혹은 그 부위를 부르는 더 많은 단어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보지, 난자, 잔소, 아기집, 나팔관. 나는 백과사전 8권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런 단어는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왜, 양도 해파리도 코뿔소도 자기 페이지를 가지고 있는데 내 생식기는 없지?’

-본문 중-

생기대나 탐폰 광고에서 여자들은 모든 것이 하얗고 순수하고 무취한 세계에서 춤추고 실내 수영장에서 헤엄쳐 다닌다. 게다가 심지어 다른 어떤 날보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이러한 모습에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는 내 허벅지 굵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날에는 해변에서 춤을 춘다거나 물속에서 성큼성큼 팔 젖기를 할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는 쓸모없고 추한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본문 중-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성과 관련된 것은 입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야동이 흔하고 인터넷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혹은 영상으로 행위를 담아내기 전까지는 혼자 상상하거나 기껏해야 상상력을 글로 쓰거나 농담처럼 툭 내뱉는 것이 성에 대한 최대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입밖으로 함부로 낼 수 없는 개념은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욕으로, 상황을 비꼬는 위트로 포장된 농담으로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다보니 성과 관련한 것은 은밀하고 불법적으로 숨어 버렸다. 청소년들은 야동을 통해 잘못된 성 개념을 배우고, 2차 성징으로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또래 안에서 해결하려고 든다.

대부분 여성들은 평생 살면서 자신의 생식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남성들이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성을 이제 밖으로 적나라하게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의 생식기 모두 신비롭다거나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다. 생식기와 관련한 단어들을 입밖으로 거침없이 내뱉을 만큼, 손과 발같은 신체 부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리를 마법이라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서로를 못생겼다고,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열셋, 열다섯, 스무 살의 수천 아이들과 연결되는 가느다란 실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나는 한 여자아이가 몸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다 못해 파괴하고 싶을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그 사회에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 중-

나는 수많은 밤을 침대에서 허벅지와 배의 살을 움켜잡고 꽉 쥐어짜며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보냈다. 내가 누르고 또 누르다 보면 한순간에 내가 가진 필요 이상의 살이 증발하기라도 한다는 듯. 하지만 뚱뚱하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과 답답함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청소년기에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수없이 자문했다. 내가 뚱뚱한 건 아무 상관없고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욕설과 끝없는 무시였다고 세상을 향해 외치려면 어떤 목소리가 어울렸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가 나처럼 침대에 누워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끔찍하게 혼자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본문 중-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미가 정말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일까? 대중매체를 통해, 혹은 남성작가들이 규정해놓은 뻔한 아름다움 아닐까?

남성들이 좋아하는 청순가련형의 베이비페이스의 글래머러스한 몸매, 선이 가늘지만 건강한 몸매, 날씬한 몸매… 몸매, 몸매, 몸매…

남성들의 미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식욕을 참고, 방법도 모르면서 운동기구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추구하는 미가 날씬한 몸매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개인의 선택에 의해, 즉 나 자신의 의지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 하지만 날씬한 몸매가 사회 기준이 되어 버려 조금의 여백의 살이 허용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것은 문제다. 모든 여성이 사회가 만족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문제인 것.

한편으로는 리치가 이야기하듯, 여성 문학의 유산은 평가절하 당하고, 지워지고, 파편화되었다. 선구적인 여성들을 재발견하는 것은 핵심적인 일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우리의 이야기와 연결하는 것은 권력을 가지는 하나의 방법이다. 권력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결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이제 우리 여자들이 펜을 가진 이상-대학에 더 많이 가는 것도, 더 많이 읽는 것도 우리들이다-권위를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민망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서사화해야만 한다. 일인칭으로 쓰는 우리들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만이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다. 여전히 월경과 성적 괴롭힘과 젠더 폭력과 살찐 몸과 모성에 대한 훨씬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본문 중-

이 책이 특히 좋았던 부분은 마지막 여성의 삶을 사회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작가의 권고다. 여성의 힘든 삶이 내 선택이 아니고 오랜 시간 많은 여성의 희생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모두가 공감하고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내 이야기, 우리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내 딸들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힘을 가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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