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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교차 페미니스트 여성 독자로서, 이 소설집은 차림상이 풍성했다. 다양한 연령대 여성의 삶을 담아낸 단편들은 대체로 완성도가 좋고 울림도 있다. 특히 세상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어떤 여성들―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오며 서로 도운 사람들의 계보를 느꼈다. 세대를 넘어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각은 언제나 용기뿐만 아니라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우리의 존재로 누군가가 위안을 얻고, 또 한 번 희망을 품고 세상을 걸어 나가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라는 행위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소설집의 많은 여성 중에서도 각별히 애정이 가는 인물들에 대해 적자면, 『매화나무 아래』의 금주는 한때 ‘말녀’였던 동생 동주의 개명을 지지하고 이름을 곧잘 불러준 고마운 언니이자, 외손자 승훈을 괴롭히던 소년들을 혼쭐낸 든든한 외할머니다. 그런 금주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때, 홀로 연명치료를 주장하는 승훈은 ‘아무것도 못 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동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걸까요?” 기실 그런 의문에는 정답이 없다고 보아야 하겠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 매화나무 아래에 선 동주의 생각 또한 그와 궤를 같이한다.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이 두 문장에 담긴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흔히 나이듦은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동주의 꽃과 눈이, 겨울과 봄이 같은 세상은 차갑기보다는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동생에게, 외손자에게, 그 밖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나눈 금주가 있었던 세상이다. 작가는 금주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대신, 금주의 존재로 하여금 동주의 삶에 다정이 함께하리라는 사실만은 명확히 알려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떤 유대는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어서 『오로라의 밤』의 효경은 고등학생 시절 친구에게 받은 엽서로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다는 꿈을 오래도록 간직해왔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청년층(구체적으로는 갓 스물이 아닌) 사이에 유행하는 말 중 그런 소리가 있다. ‘우리 나이에 못 할 일은 키즈 모델밖에 없다’고. 외손자를 볼 만큼 나이든 효경이 자신보다도 나이든 여성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옐로나이프에 오로라를 보러 가고, 또 그 시어머니가 효경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영어로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효경의 옐로나이프 여행이 딸의 선택으로 의도치 않게 연결되었듯이, 효경의 삶이 끝으로만 향하는 대신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아쉽게도 주인공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우리 엄마와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내 또래 혹은 그 이하의 딸이 있는 장년 여성들―누군가의 엄마로 불려온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떤 감상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언젠가 6월 항쟁의 최루탄 냄새를 이야기했던 엄마가 시위를 언급하는 내게 ‘그런 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기억이 있어, 한때 페미니스트라 불린 주인공이 딸 주하에게 “업데이트 좀 해”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통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엄마를 사랑하는 딸로서, 엄마가 소위 ‘가르침이 필요한 뒤처진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많은 유자녀 장년 여성은 자신의 의식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고, 딸과 함께 나아갈 기회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조금 느린 속도를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이 ‘먼저 자란 여자아이’에 대한 배려이고 예의다. 어느 날엔 딸과 엄마가,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틀딱’이라는 비하 표현이 신조어로 유행하는 작금, 세대 간의 이해와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시대에 이 소설집이 나와 고맙고 기쁘다. ‘우리가 쓴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여자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