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독설 -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고전의 힘 고전오디세이 02 2 고전오디세이 2
정천구 지음 / 산지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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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전의 또 다른 이름은 아마 불멸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원전 춘추전국시대의 삶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2012년의 대한민국은 매우 다르다. 먹는 음식이 다르고 입는 옷이 다르고 하는 생각까지도 다른데, 어째서 같은 책을 읽는 것일까.

 

‘…천리마가 거대한 장벽을 만나서 우뚝 서버린 꼴이다.…이 장벽은 단순한 경제적 장벽이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등 모든 분야가 뒤얽힌 장벽이다. 이제 이 장벽을 무너뜨리거나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소 거친 방법을 써야 한다. 좌충우돌해야 한다. 이리저리 내달리며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 『맹자』보다 더 나은 고전을 찾기는 힘들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병증을 잘 보여주는 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맹자를 새롭게 읽으려 한다고 했다. 왜 하필 맹자일까?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 임금이 걸을 쫒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그렇다고 하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 된 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습니까?”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 하는데, 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은 한 평민에 지나지 않기에, 한 평민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폭군이었다고는 하나 아무튼 일국의 왕을 서슴지 않고 평민으로 끌어내리는 대담한 화법을 보라. 맹자는 “백성과 사직과 임금 중 백성이 가장 귀하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하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상의 칼을 들이대는 맹자의 말에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도 시원함을 느낄 것이다.

 

‘실제로 가르쳐본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질이 뛰어나다…그러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대학의 마법에 홀려 있어서다. 비싼 등록금과 있으나 마나 한 장학금, 수준조차 운운할 수 없는 강의들이 대학의 마법이다…맹자는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전쟁에 쓰는 것을 ‘백성에게 재앙을 내린다’고 하니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는 자는 요나 순 임금의 시대에도 용납되지 못했다” 고 했는데, 이런 대학들을 어찌해야 할까? 계륵이 되어버린 괴물들을.’

 

『맹자독설』에는, 고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용한지를 아는 이가 드문 세상에서, 사회의 일들을 제대로 다루기만 하면 독자가 고전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리라 생각하고 고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저자의 뜻이 곳곳에 짙게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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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노재열 장편소설
노재열 지음 / 산지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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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물수건 때문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을 부으면 ‘꺽꺽’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듯이 그 물은 고스란히 목구멍 기도로 들어가지. 그 고통은 죽음 그 자체야. (중략) 공기 대신 물을 들이마시게 되면 급기야 폐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들면서 토하게 되지. 차라리 토하면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살아나는 방법이 되는 거야.’
 
 
『1980』은 소설이지만, 환상의 세계에서 하늘하늘 자유로운 종류는 아닙니다. 마치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로 운을 떼는 귀신 이야기 같습니다. 읽는 내내 80년대에 벌어졌던 비인간적 폭력과 몰상식에 질리고 놀라지만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평범한 대학생 주인공을 앞세운 집요한 서술로 이 잔인함이 우리에게 분명 존재했던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이 또한 허구의 영역이려니 하고 슬쩍 도피하려는 독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늘어집니다.
 

책을 읽은 뒤 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았던 문장들은 ‘작가의 말’ 속에 있습니다. (소설보다 후기가 훌륭했다고 폄하하려 함은 아닙니다.)
 
 ‘심지어 1980년대식의 글 나부랭이들, 우려먹기 식의 후일담이나 쏟아낸다는 평론들에는 가슴이 섬뜩할 정도의 공포가 일어났다. 그 시대, 유인물 한 장을 쓰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시대의 공포심보다도 더하게, 이 시대,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 시대가 더 무서워졌다. 억압은 총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 치 혀끝에서도, 억압은 총칼보다도 더 무섭게 시대를 장악하고,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고,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급기야 퇴행의 역사를 만들려 하고 있다.’
 
 
 마침 이상의 시 <오감도>를 이 책과 함께 읽고 있어서인지, 1980년대의 청춘인 저자(그리고 주인공 정우)가 도로를 달리고 있는 ‘아해’ 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0년대의 청춘인 저의 대학 시절에는 유신과 독재에 맞서 싸우는 학우들 대신 두꺼운 토익책과 2400자를 넘겨야만 하는 자소서에 맞서 싸우는 학우들만이 존재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때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른다는 것은 때때로 어쩔 수 없거나 당연해지고 1980년대의 최루탄 가득한 거리를 달렸던 아해는 혼자서 두려워하겠지요.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아해’ 들이 만드는 한층 더 교묘해진 억압이 아닐까요.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아해’ 라면 무서운 아해는 누구일까요.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 인 지금,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자가 섬뜩해할 만한 평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만 퇴행의 역사에 무관심으로 일조하였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진 못할 겁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오롯했던 것이 아니라 그때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싸워 얻어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도로를 질주하는 아해들이 무섭다고 그럽니다. 노재열이 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그 아해들과 마주쳤습니다. 적당한 뚫린 골목을 만날 날은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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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맘 - 2012 이주홍문학상 수상도서, 2012 한국도서관협회 우수문학도서
조명숙 지음 / 산지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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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그림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쥐고만 있어도 손에 시커멓게 묻어나는 4B연필을 가지고 석고로 만든 구나 정육면체를 보고 그리곤 했습니다. 어린 관찰은 마냥 지루한 과정이어서, 밝은 면, 중간 면, 어두운 면을 눈대중하며 대강대강 칠하곤 했습니다. 어둡기만 한 저의 데생 아래쪽을 선생님이 지우개로 누르며 알려 주셨던 것은 ‘반사광’ 이었습니다. 밝은 면, 중간 면, 어두운 면, 그 다음엔 더 어두운 면이 아니라 반사광이 있듯, 밝은 생, 중간 생, 어두운 생이 존재하는 조명숙의 소설에는 빠진 어깨로 고양이의 시체를 치우는 소녀가 있고 아버지와 함께 호루라기를 불어 주는 여자가 있습니다.

 
 
사라졌을 때 만나는
<어깨의 발견>에서 케리와 효주와 지수와 나는 사라진 영주를 발견했―혹은 착각―했을 때 만납니다. <거꾸로 가는 버스>에서 유와 분투, 을지와 삼미와 나는 에이의 장례식장에서 모입니다. 누군가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서로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영주와 에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영주는 헐거운 비행 소녀이고, 에이는 결혼에 여러 번 실패한 장애인입니다. 사람들이 영주나 에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모입니다. 타인의 애정도 연민도 증오도 얻지 못한, 나약한 존재의 빈 자리에서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빠져나와 날아간 새
<댄싱 맘> 속 어머니의 시체에서, <까마득>이 영감을 얻은 그림에서, <나쁜 취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은 자신을 끄집어내거나,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어 어디론가 가려 합니다. <댄싱 맘>의 말 많은 어머니가 뒤주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첫 번째 자식의 입을 빌려 그녀의 썩은 몸은 새로 바뀝니다. <까마득>이 참고한 노은님의 <새>는 파란 바탕에, 초록 날개를 가진 흰 새의 그림으로, 주인공 ‘흐엉’은 파란 풍경 속의 자신을 끄집어냈습니다. <나쁜 취미>에서 나와 제이는 사고에 몸을 내던짐으로써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죽었고, 흐엉은 스무 살이 많은 외국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녀들의 시도는 굳이 구분하자면 실패와 불운의 축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그런 선택을 한 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의든 타의든.
 
 
당신 뭐야?
<바람꽃>의 상희는 안면도 없는 ‘나’의 아버지를 데려와 같이 호루라기를 불며 노는 여자이고, <비비>의 ‘그녀’는 검은 옷의 콰르텟을 이끌고 나타나 ‘나’ 의 사무실에 비비탄을 쏘고 사라지는 여자입니다. 존재는 신비하기까지 하고, 행동엔 논리나 상식이 없습니다. ‘나’ 들은 그녀들의 언행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함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계속 만나려 하고,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같이 잡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건, 단순히 따분해서건 ‘나’들은 그녀들을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겠지요.
 
 
우리는 보통 소설을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혹은 영영 그러지 못합니다.) 『댄싱 맘』의 경우는 반대로, 글을 읽기 전에 이미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여성 작가들의 그림과 관련된 소설이므로 그림 이야기를 오히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그림을 감상하듯 읽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처음에 반사광 이야기를 했지만, 책에서 그 존재부터 찾으려 하진 마십시오. 그것들을 쉽사리 희망과 낙관이라 부르기는 망설여집니다. 너무 희미하여 단순한 여백이라 부를 수도 있고, 그러나 분명 분명하니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문장들에게 이름을 붙여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우리 너무 환한 세상은 잠시 잊도록 합시다. 그리고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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