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산방 일기 - 시인 박남준이 악양 동매마을에서 띄우는 꽃 편지
박남준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박남준 산방 일기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순례의 길에서 잠시 들렸던 거제도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들었다. 태풍 매미가 왔을 때 파도가 마을을 덮치고 갔는데 물에 잠긴 지역이, 파도에 휩쓸려 뼈대만 남은 집들이 모두 바다를 매립한 곳이었다고 했다.

 

쓸모없다 여긴 모래사장과 갯벌을 매립하여 하나 둘 집들이 들어소고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아마도 바다가 자신의 몸을 함부로 빼앗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것이 아니겠냐는 마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생명에 대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생명평화탁발순례의 길,

 

많은 이들을 만났다. 자식들 다 도시로 떠나버려 버림받은 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아 병으로 누워 있는 꼬부랑 할머니를 만났으며, 죽어라 일만 했으나 빚더미에 올라앉아 일하는 낙이 없다는 늙은 농부를 만났으며,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아 주식투자를 했으나 모두 날려 버리고 아내마저 집을 나갔다는 젊은이를 만났으며, 외국 유학까지 했으나 산중 고향마을에 내려와 어린 날 꿈꾸었던 목장의 아저씨가 되기 위해 소 두 마리를 키우며 농사일을 배우고 있다는 앳된 청년을 만나기도 했다. 목사를 만났으며 신부를 만났으며 원불교 교무를 만나고 수녀를 만나고 스님들을 만나 함께 길을 걷기도 했다. 눈보라를 만났으며 비바람을 만났으며 님도 몰라본다는 봄볕에 까맣게 얼굴이 그을리기도 했다.

 

 

우리의 전통 한옥 중에서 궁궐 같은 집들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방으로 들고나는 문의 높이가 낮다. 지붕이 낮으니 문 또한 높이를 그에 맞게 해야 했을 것이며 추운 겨울철 보온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이 낮은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물론 이런저런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 중에 한 가지, 그것은 겸손과 공경의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손님들에게 있어서는 겸손의 도리를, 주인에게는 공경의 몸가짐을 삶에 배게 하려는 건축의 철학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금강산이며 묘향산, 가야산 등지의 외지고 깊은 곳을 오르며 이곳이야말로 아무도 오르지 않은 곳이라 여겼던 곳마다 어김없이 김홍연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며 화를 발끈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위험천만한 고비에 이르러 낙망을 하다가 깍아지를 듯한 절벽에 새겨진 그의 이름자를 보고 아 그도 여기에 왔다 갔구나 하고 힘을 내어 무사히 험한 길을 헤쳐 나갔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런 쓰레기들은 아니다.

 

 

바로 전날에도 밭에 나가 호미를 잡고 일을 하다 일가붙이 가족들도 없이 고요하게 숨을 거둔 어느 할머니가 있었다. 한낮이 되어도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 본 마을 이장이 그이의 죽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이의 집 툇마루에는 검정 고무줄에 묶여 저금통장과 막도장이라고도 하는 싸구려 나무도장이 매달려 있었다. 저금통장에는 돈 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 돈 백만 원을 찾아 마을 사람들이 관을 마련하고 그이의 밭 한쪽에 무덤을 썼다. 초상을 치르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저금통장에는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으니 후일에 누가 있어 찾아와 무덤 위에 소주 한 잔 부어 주겠는가. 찾아올 이 없는 무덤을 쓴다면 얼마나 쓸쓸한 일이랴. 그러니 화장을 해야겠지. 관을 마련하고 화장터를 사용해야하고 또 어찌어찌 알고 찾아온 이들 술 한잔 받아 줘야 하고 한 이백만 원 정도면 되겠지.

 

 

건강을 위해서 자연농법이나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밭은 가꾸어 본 적은 없다.

 

밭을 일구는데 삽을 써서 흙을 갈아엎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삽으로 흙을 뒤엎을 때마다 삽날에 잘린 지렁이가 붉은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삽을 쓸 수가 없었다. 호미로 씨앗을 심을 자리를 살짝 파고 파종을 하고는 했다.

 

 

배추와 무를 심은 텃밭에 나가 벌레를 잡는다. 배추 잎이나 무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초록색과 갈색과 검은색 벌레가 있는데 식성들이 어찌나 왕성한지 며칠 돌보지 않으면 하얀 줄기만 남겨 놓고 다 먹어치워 버린다.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나고 봄이면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어 눈을 즐겁게 할 녀석들이지만 어쩌겠는가. 동치미도 담고 김장을 하려면 잡아 주어야지. 돋보기를 쓰고 핀셋을 들고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벌레들을 잡아 채소들 곁에 묻으며 니 몸을 먹고 자란 것이니 니 거름으로 쓰거라. 극락왕생 극락왕생을 중얼거린다.

 

참 모질기도 하지.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것뿐이디 결국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벌레들과 나눠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저기 안동에 사시는 권정생 선생님께서는 그 비좁고 남루한 집에 사시면서 마당에 풀도 뽑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오 쥐도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사신다는 데 내 꼴은 어떤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