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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SF전문 출판사 '허블'의 네 번째 책이 미국 작가인 폴 맥어웬의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피코>, <관내분실> 등 국내 작가의 SF작품을 발굴하는 일에 주력하던 허블의 첫 번째 SF번역물이기 때문이다. 코넬대 물리학과 교수이자 나노과학의 대가이며 하버드, CIA 등 다양한 기관의 자문위원을 겸한 저자 폴 맥어웬은 아직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이력과 탄탄한 과학 지식은 국내 독자의 이목을 끌만하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즈마키'라는 균류를 퍼뜨려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세력의 대결구도이다. 결말은 당연히 균류의 전파를 막으려는 세계의 승리로 맺어지는바, <소용돌이..>는 전염병이라는 재앙을 다루는 판데믹 서사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우즈마키를 막을 비책을 알고 있는 과학자 '리암 코너'가 죽은 뒤, 그가 사랑하던 이들이 우즈마키를 이용하려는 세력에 맞서 각자의 고군분투를 펼친다. 이 과정은 때론 지난하고,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여 민망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단순한 플롯에 대한 불만을 가라앉히고 나면, <소용돌이..>는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의 또 다른 방법을 일러준다. 이 소설의 관심사는 선악의 명징한 구분이나, 악에 대한 선의 처절한 응징따위가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덮친 죽음의 공포, 나아가 실제로 닥친 죽음의 위협과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싸운다. 이를 죽음에 맞선 인간의 장엄한 승리, 극복, 따위의 흔한 서사로 '퉁쳐' 이해한다면 재미가 없다.
"제이크는 죽음이 엄청난 낭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있던 사람이 다음 순간에는 시체가 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냉혹하게. 돌이킬 수 없게." (114) - 이처럼 '죽음은 낭비'라는 간단한 도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저자인 폴 맥어웬은 확실히 과학자다. 철학자나 문학가라면, 다가오는 죽음보다 먼저 죽어버리는 선택인 자살 따위를 '주체적'이라며 치켜세우거나, 신념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 소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폴 맥어웬은 '죽음은 낭비'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죽음'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면 벌어질 수 있는 괴로운 상황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귀애하는 이들의 죽음, 그리고 그들의 시신이 전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 결말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이른다. 자연스럽게 독자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순간 '죽음은 뜻없는 낭비'라는 가설이 <소용돌이...>의 서사 전반을 통해 사실로 입증된다. 그러고보니 저자인 폴 맥어웬은 죽음에 대한 아무런 낭만도, 환상도 없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면, 오직 회한만이 남아있다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는 내가 아끼는 이들을 전심전력을 다해 지킬 뿐이다. 어쩌면 이 책은 '죽음에 맞서는 한 방법'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가장 참신하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몇명의 일본인과 중국인이 등장한다. 작가는 일본인의 죽음숭배나, 중국인의 성품, 풍습 등을 언급하려 했으나, 그 서술이 다소 평면적이다. 아시아 문화에 대해 더 풍부한 이해를 갖고 있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지나치게 전형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캐릭터 연구가 아쉽다.아시아계 인물들은 대체로 악역으로 묘사되는데, 인물의 납작한 묘사가 악인의 심리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무의식에는 미국 바깥의 세계가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거나 압도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 이 점이 반영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