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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 왜 이렇게 유도리가 없어?"
이 말은 내게 정말로 듣기 불편한 말이다. 이 말은 지켜야 할 법칙,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혹은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지키기 싫을 때, 내가 그 원칙을 지키기 싫다는 표현을 타인을 매도하면서 강요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 특히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도덕성이 부재한 시대처럼 보인다. 교통 법규는 잘 지키는 사람이 손해라고 생각한다. 법망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떻게든 세금을 덜 낼 수 있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률과 규범으로서의 도덕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성' 내지는 '도덕 자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대에서 과연 도덕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이 존재하여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게끔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 법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책에서 칸트는 그 도덕 법칙의 가능함에 대한 '기초 놓기'를 시도한다. 아마 현대적 관점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이야말로 도덕성에 대한 강한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칸트 도덕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필독서이자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직접 저술한 책들 중에서는 가장 쉬운 책으로 손꼽힌다.(그래도 정말 쉽지 않을 수 있다. ㅠ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세계적인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면서 자신의 비판 철학에 대한 체계를 세운 후에 쓴 책이 바로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도덕형이상학 정초)"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깊이 공부를 하고 싶다면,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까지 읽으면 좋다. 그러나 그 난이도는 심히 괴악하리라...
칸트는 이 책 1장,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에서, "세상 안에서나 세상 밖에서나 무조건적으로 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면서 전통적인 윤리학적 사유를 거절한다. 전통적인 윤리학은 '용기', '지혜', '절제', '판단력'과 같은 '탁월함(아레테)'을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사유했던 경향이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매우 선한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탁월함이 그 자체로 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러한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탁월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악인보다 훨씬 더 흉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칸트는, 오직 선의지가 전제되어 있을 때에만, 그 탁월함에 기반한 다른 행동들이 선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칸트는 선과 행복이 일치하고 있었던 이전의 전통 윤리학적 사유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행복을 위해서 선을 의욕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이유는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스토아적 금욕주의 역시도 이러한 선을 행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첫째, 만약,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행복을 위해 선을 행위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보상과 만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것이 오직 '선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더 도덕적이며 더 선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차원에서 칸트는 그 유명한 "의무"의 개념을 설명한다.
의무라는 것은 바로 "해야만 한다" 인데, 영어로는 Ought to, 독일어로는 Sollen으로 쓰는 말이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자체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바로 의무이다. 오직 의무에 의해서 하는 행동만이 가장 선한 행동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물론 칭찬해 줄 만 하고, 개인적으로는 의미있으며 훌륭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도덕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이 때, 그 사람의 탁월함은 칭찬해 줄 수 있지만 서울대 입학 자체가 도덕적 행위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는 열심히 공부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 공부를 열심히 함은 물론 그 자체로도 도덕적 행동이 아니다. ㅋ_ㅋ) 그러나 만일, 자신의 어떤 만족이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도덕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덕성은 어떻게 보편화될 수 있는가? 칸트는 그것은 이 행동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행해질 때, 내가 기쁨으로 동의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 보면 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 공항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주웠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지갑에 든 돈을 거리낌없이 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을 때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동일하게 거리낌없이 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주운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은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하는 도덕 법칙이 보편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칸트는 계속해서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를 차근 차근 계속해서 시도한다. 더 깊이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직접 책을 읽어 보시라. ㅋㅋㅋㅋㅋ
이러한 사유는 일견 딱딱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원칙이 필요한 사회, 청렴함이 요청되는 사회에서는 칸트적 사유와 같이 더 엄격하고 엄밀하게 도덕성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치판에서, 관에서, 군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러한 도덕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시대에서, 유도리있게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의무에 맞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 가장 옳은 방법으로 정확하게 사회의 선을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 현대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 철학은 지금도 우리에게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쉬며, 최근에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