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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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즈음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기획한 신동흔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 한창 여러 강의를 수강하던 중이었기에 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었던 옛이야기에서 오늘을 살아갈 지혜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그 연장선에서 신동흔 교수님의 신작 <신화, 치유, 인간>이 출간되어 반가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삶을 일깨우는 영원한 신성의 이야기’인 ‘신화를 거울로 삼아서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고자 했다’며 이 책의 지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신화 안에는 수많은 ‘나’가 존재한다. (생략) 신화 속 인물들에게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순간, 신화는 나의 것이 된다.”(p.16)
“신화는 힘이 세다. (생략) 이야기의 주인공은 외적 타자를 넘어서 ‘또 다른 나’로서 의의를 지닌다. 근원적인 나이고 존귀한 나다. 나보다 더 소중한 나. 그와의 서사적 합치를 통해 사람들은 신령한 존재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한다. 미력함과 무의미함을 넘어서는 본원적인 치유 과정이다.”(p.17)

아득한 시간동안 소멸되지 않고 사람들의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온 이야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존재의 이면을 비춰주는 힘’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를 도구로 삼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치유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인생에서 맞닥트리는 고난과 장애물은 ‘영웅이 되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이라며 위로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영웅이란 열매가 맺기 위해서 필요한 거름. 당면한 문제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기 위해 노력하며 다소 위안을 얻었었다. 그렇기에 책에서 말하는 자기서사의 문학치유라는 과정이 그리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신화, 치유, 인간>은 그리스 로마, 북유럽, 수메르, 중국, 몽골, 한국 등 세계 여러 신화를 통해 근원적 존재의 이유, 삶에서의 과업과 투쟁, 사랑, 관계, 상실,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신화가 많이 있었지만 다 소개할 순 없으니 몇 가지만 추려보았다.


1장에서는 이 세상과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창조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원생명에서 현생명으로, 그렇게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것으로 끝이냐면 그럴 리 없다. 모든 것은 원상태를 향해 움직인다. 지금 떨어져 있는 하늘과 땅은 어느 날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생략)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돌아감일 따름이다. 우리가 온 그곳, 아득한 원생명의 세계로의. (생략) 또 다른 영겁을 향해서. 현실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신화의 시간은 영원하다.”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기가 또다시 찾아오면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다. 어떤 때는 염세주의에 빠져 지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그 혼란. 모든 것들이 피고 지는 순환의 흐름 속에서 나를 바라보니 덤덤해졌다. 나도 태어났으니 죽음은 자명한데, 영원한 신화적 우주에서 얼마나 짧은 삶인지. 부풀어 있던 고민들이 쉭 꺼져가며 작아 보였다.


2장에서는 자연에 맞서며 적응해 왔던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으로 표현된 자연의 흉포함, 그러나 그 자연 속에서 생을 이어왔던 인간들. 태초의 거인신과 문명신의 이야기를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 흥미진진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 12신 중의 하나로서 한정된 역할을 하며, 많은 경우 그가 아닌 다른 신들이 나서서 움직인다. 이를 문명사적으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원시의 크고 거친 힘에 대하여 다양한 직능별 분화를 이룬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자연의 큰 힘과 싸워온 긴 투쟁의 결과물이다.”(p.86)


3장에서는 여러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리스로마 신화의 테세우스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미노타우루스라는 미궁 속 괴물을 물리친 테세우스는 말년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정작 자기 내면 속의 미노타우루스를 제압하지 못하고 풀어놓았으니.
“한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귀나 물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지... 그 전락의 속도는 얼마나 걷잡기 어려운 것인지... 황소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동물적으로 뒤틀린 인간의 신화적 상징이다. (생략) 그 짐승은 인간의 내면이라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에서 검은 눈을 번득이고 있다”(p.152)
“내 안의 욕망과의 싸움이란 이렇게 힘든 법이다. 눈에 보이는 크고 중요한 과업 앞에 설 때는 오히려 문제되지 않는다. 거기 집중해서 힘을 낼 것이므로. 정말 어렵고 중요한 바는 사소한 일상이다. 일상 속의 소홀함과 범람함이 시나브로 존재를 갉아먹어 결정적으로 무너뜨린다. (생략) 미노타우로스는 어딘가에 늘 도사리고 있다고. 죽어도 새로 살아나게 되어 있다고. 그와의 싸움은 평생을 걸쳐 이어가야 할 존재적 숙명이다.”(p.159)


4장 애정 신화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가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이겨내고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신이 된 바리데기가 기억에 남는다. 기구한 그녀의 인생을 보자면 불평, 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는데, 바리데기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며, 희생하며 부모를 살리고 자신을 구원하며 나아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자리에 앉는다. 조그만 내 계획과 기대에 어긋나도 쉽게 마음이 상하는 나에게 있어서 바리데기는 저 먼 곳에 있는 존재일 뿐이지만 그녀가 내게 전하는 말이 있었다.
“나뭇잎이 피고 지는 것은, 비에 젖다가 햇살에 빛나는 것은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들거나 뿌리 뽑혀서 죽는 일도 마찬가지다. (생략) 여기 이렇게 숨 쉬면서 움직이는 나,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나. // 어둠 대신 빛을 보면, 고통 대신 행복을 보고, 절망 대신 희망을 보면, 병 대신 약을 보면 세상은 달라진다. 우리는 이를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 축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움직여서 앞으로 나아가야 내 것이 될 수 있다.”(p.221)
"바리여신은 (생략) 사랑은 빛이나 행복에, 희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빛과 어둠, 행복과 고통, 희망과 절망은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한다. 그 모두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늘이 우리에게 허여한 사랑의 과정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사라이다.“(p.222)



5장 생사 신화에서 ‘죽은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저승에 내려갔던 오르페우스 신화’를 통해 집착을 내려놓고 ‘심리적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훌륭한 리라 연주로 저승의 신을 감동시켜 아내를 이승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오르페우스. 지하세계에서 이승으로 가는 도중 뒤를 돌아보는 실수를 저질러 아내와 헤어지게 된다. 죽은 아내에 집착해 현실을 보지 못하던 그는 끝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좋았던 지난날에 대한 집착과 끝모를 현실 부정 속에서 그는 심리적으로 해체된 것이었다. 문학치료식으로 말하면, 폭주 끝에 길을 잃어버린 서사가 어둠 속에서 와해된 상황이다. 세상에는 다시 해가 뜨기 마련이지만, 깊은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둔 이에게는 남의 일일 따름이다. (생략) 현실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깊은 동굴에 가둘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 교사의 신화로 읽는다. 그러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스스로 동굴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지 않은지를.”(p.251)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나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져준다. 동굴 속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고. 발버둥치지 말고 과거의 나를 보내주라고.

저자는 우리의 삶이 하나의 신성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에서 ‘신령한 역사가 깃든 서사’를 ’온전한 나의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신화 속의 수많은 영웅이 우리 자신에게 의미 있게 들어와 깃들 수 있음을 (생략) 수많은 영웅신화들은 서사적 접속과 연결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제각기 서로 다른 관심과 방향으로. 도전을 통한 초극적 자기 실현이라는 하나의 같은 길로. // 중요한 것은 모양새나 결과가 아니다. 움직여 부딪치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디에서인가 하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인가 하면 나 자신의 방법으로.”(p.147~148)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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