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옳다

누구나 도울 수 있다, 적정심리학 -

 

  대화에 자주 오르는 베스트셀러여서 분량이 조금 적고 가벼운 내용인줄 알았다. 내 선입견이었을 뿐 담고 있는 내용이 가볍지 않다. 저자는 외형이 아름다운품새 무술이 아니라 강력한 위력을 지닌실전 무술이 책에서 다루는 적정심리학이라 말한다. 자격증을 가진 조리사들이 만드는 화려한 외식은 안 먹어도 문제가 없지만 자격증이 없는 엄마가 만들어도 집 밥을 오래 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자격증을 너무 믿거나 의지할 게 아니라 누구나 마음을 기울이면 심리적 응급상태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단다. 표지에 익숙지 않은 영감자가 나온다. 같은 분야에서 저자에게 도움을 주는 남편이다. 남편이 쓴 책에는 거꾸로 아내가 영감자로 기록되어 있다.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건 공감과 경계였다.

  전문가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사람인가 보다.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행하는 정확한 지점을 울리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런 질문을 하고 대답이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을 막으며 듣고 질문하기를 반복하면 공감에 이를 수 있단다. 저자는 쉽게 설명을 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노력을 거쳤을 게다. 그 과정을 거쳐 공감에 이르는 바르고 빠른 길을 익힌 게다. 바둑의 달인 이세돌이 흰 돌과 검은 돌을 번갈아 놓아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가 이기는 것이 바둑이니 바둑돌을 놓는 손만 있으면 누구나 바둑을 잘 둘 수 있다거나 손으로 농구골대에 농구공을 잘 넣으면 이기는 경기니 손만 있으면 농구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게다.

  저자는 자격증이 있는 치료사가 상담실을 찾아온 이들을 대할 때는 그들을 환자로 대하게 된다고 기술했다. 똑 같은 사람도 밖에서 만나면 인간 누구로 대하지만 치료를 위한 공간에서는 환자가 되고 그리되면 병명을 찾고 그에 따라 약 처방을 하려 한다는 게다. 어려움을 겪은 이들에게 우울증이 많지만 그게 무슨 병이냐는 거다. 큰 사건이나 어려움을 겪었으면 정상이 아닌 감정을 느끼는 게 왜 이상한가, 그것이 무엇 때문에 병으로 다루어지고 그들이 환자가 되어야 하느냐는 게다. 세월과 함께 적절한 적응을 거치며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라는 게다. 자녀를 잃은 부모나 평생 일했던 직장에서 퇴직한 이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냐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가 제약회사와 의료진들이 병이라 이름 지어 환자를 만들어 낸다는 게다.

  한 사람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어도 죽을 이가 없고 심리적 황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 궁금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궁금하면 근원적인 것들을 묻게 되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 치유가 된다는 거다. 그게 아니라 직업상 형식적으로 묻고 힘겹게 들으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 된다고 한다. 책 제목인 당신이 옳다는 당신의 감정 혹은 느낌이 옳다로 바꿔 읽을 수 있다. 감정 느낌 또는 마음 그것이 언제나 옳다는 게다. 그것에 공감을 받으면 상태가 드러나고 문제가 노출되고 풀린다는 게다. 마음에는 공감하지만 행동은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공감에 이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곳까지 이르지 못한다 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치료가 이루어 질 수 있다.

  경계도 중요하다. 공감에도 행동에도 국가나 가정과 마찬가지로 경계가 분명해야 하고 그것이 무너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게다. 남자친구를 인사 받고 딸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모친은 경계를 넘은 것이고 그로인해 결혼을 못한다면 딸은 경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게다. 최종적 결혼의 결정권은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집단사고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사람은 다 고유하고 독특한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무리에 속해있고 직업이 무엇이니 그러할 것이라는 게 집단사고이다. 개별적인 존재를 집단으로 단순화하니 풀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감정에 대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나누는 것도 옳지 않다. 감정은 계절이나 날씨처럼 그때그때 달라지며 변하는 것이지 좋고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부끄러워 할 것도 아니고 굳이 감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순위에 있어서도 항상 자신이 먼저여야 하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타인의 문제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단다. 자신이 먼저고 자신이 상수이며 자신이 갑이 되어야 한다(꼭 갑을 관계가 아니라 갑갑 관계가 옳다).공감에 있어 항상 윤리적으로 거짓이 용인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우선 생명을 살려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피해야 할 것이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다. 그런 것들로는 심리적 문제가 해결될 수도 풀릴 수도 없다. 공감이 되고 추운 곳이 덥혀지듯 따듯함 속에서 문제가 풀린다. 자신이 받아들여져야 기본관계가 형성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다른 이를 향한 공감과 심리응급구조를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단번에 잘할 수 있는 방법, 프로그램을 깔 듯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일 게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으로 궁금해 하며 상대를 대하는 것이 공감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지 오웰의 1984

현 사회가 차츰 닮아가는 세상 -

 

  빅 브라더, 오브라이언, 윈스턴, 줄리아 1984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이다. 평화부, 진리부, 애정부, 풍부부 이 책에 나오는 주요기관들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당의 세 가지 선전 문구다. 텔레 스크린, 마이크로폰, 스파이단, 사상경찰, 감시와 통제를 위한 시설과 인력들이다. 2분 증오, 증오주간, 숙청, 증발,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실시되는 일들이다.

  당과 빅 브라더가 하는 일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깨지 않기 위해 과거가 계속 조작되어지고 이전의 증거들은 말살한다. 저속한 노래를 만들어 보급 유통 시키고 산업은 항상 초과달성으로 보도한다. 서로 감시하고 고발해서 언제 어디서 체포 구금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잠꼬대와 표정까지도 유죄의 근거가 되고, ·무죄의 명확한 기준이 없다.

  권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인간과 진리는 발붙일 곳이 없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려고, 물품의 소모를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는 통치의 수단이다. 언어는 점차 줄어들고 사고는 단순해진다. 신념을 품고 저항하며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세뇌되어 만족한 상태로 원해서 죽음을 맞이한다. 공동의 적을 가지고 늘 어려움 속에 살며 증오가 근본 에너지가 된다.

  미래가 점점 좋아져 이상적인 세상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예상과 기대의 반대편에서 디스토피아, 끔찍한 세상을 그린 소설1984가 보여주는 우리의 앞날이다.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 정도까지야 가겠나. 걱정스러운 것은 현실이 소설의 사회를 닮아간다는 점이다. 소설은 전제주의, 전체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모습을 그린 것 같지만 자본주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과거에는 염려 속에 경고의 의미가 강했다면 이제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실생활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다.

  언뜻언뜻 들리기는 중국에서 범죄예방과 범인검거를 위해 생체정보를 이용하는데 몇 초에 전 국민의 신상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고 한다. 컴퓨터의 성능이 나날이 개선되어 기계로 하지 못할 영역이 급속도로 축소되어 간다. 숨을 곳은 없어지고, 찾아내는 시간이 더욱 단축되는 게다. 이게 바람직한 발전이요 좋다고만 볼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심각한 우려가 있다. 정보력을 좌우하는, 기술력이 강한 개인이나 집단의 영향력이 점점 증대되어 마침내는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가고 마음대로 통제 감시되고 조작 관리될 수 있다는데 섬뜩함이 있다.

  소설 속에 윈스턴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 특히 중상류층에게 어느 순간, 그 어디도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 진실은 기억할 수 없고 그대로 행동할 수도 없다. 가정도 결코 안전하지 않고 가족을 믿을 수 없다. 남녀 간의 사랑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도 생명을 걸어야 하고 결과는 항상 비극적이다. 급속한 과거와의 단절이 통치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실재하지 않으면서 실재하는 빅 브라더, 은밀히 한 편인 듯하지만 그것마저 통치의 한 수단이 되는 오브라이언, 육체의 고통 속에 인격적 말살과 어쩔 수 없는 배신을 하고 감정조차 말라버린 윈스턴과 줄리아, 그 어디에도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고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희망은 애초에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는 투다.

  몇 해 전에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 시합을 했다. 언론들은 그래도 감()에 있어서 이세돌이 유리할 것이니 인간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단순히 말하면 어림셈이 더 나을 거란 얘기지만 컴퓨터에게 어림셈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단 단위까지 순간에 정확하게 답을 내니 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게다. 인간이야 망각을 하고 왜곡도 일어나지만 기계야 그런 게 없으니 백번을 물어도 긴 시간이 흘러도 정확한 답이 나온다. 인간의 힘과 기능이야 한계가 분명하지만, 기계는 부피가 작아지고 용량이 늘어남이 눈부신 속도로 이루어지니 인간이 당해낼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곧 인간이 백전백패(百戰百敗)하는 때가 온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기능에 밀려 많은 일자리를 빼앗겼다. 저비용 고효율이라 하지만 거의 전 분야에서 밀려나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인간이 결정적으로 이 분야는 낫다고 할 것이 급속히 줄어들게다. 아직은 인간의 통제를 받는다고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기계끼리 모든 걸 처리하는 완전자동화의 시대가 올 것이고 그들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 인간을 가볍게 넘어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1984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의한 지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통제하기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생명이 공장에서 양산될지 모른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알기 어려운 세상, 잘 못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시대를 얼마 안가 맞이할 수 있다. 어쩌면 불행한 앞날을 보면서도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지도 못하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종()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내친김에 남미까지! 키만 큰 30세 아들과 깡마른 60세 엄마, 미친 척 500일간 세계를 누비다! 시리즈 3
태원준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 내친 김에 남미까지!

200일간 모자 중남미 여행기 -

 

  300여 일간 모자가 유라시아 여행을 했단다. 어쩌면 가족 중 같이 여행하기 가장 힘든 조합이 어머니와 아들이 아닐까. 부부, 형제자매,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심지어 아버지와 딸은 그런대로 상상이 되지만 어머니와 아들은 적잖이 난감하다. 그것도 육십이 넘은 어머니와 결혼을 하지 않은 서른 넘은 아들이 함께 하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했을 듯하다. 1차 여행을 마치고는 또 가잔 말을 못하던 어머니가 방송으로 페루의 마추픽추를 보고는 떠나고 싶다고 한 모양이다.

  어느 한 곳에 꽂이면 감당하기가 어렵다. 한 번의 경험이 또 다시 먼 길을 나서는 걸 가능하게 했으리라.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일단 해보면 자신이 붙고 별것 아니라는 여유가 생길 게다. 글쓴이의 어머니도 스노클링을 하고 짚 라인을 탔다. 그런 경험을 거쳐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굳혀 가는 걸 게다.

  책을 읽으니 남미는 유적지보다도 풍광이 멋질 것 같다는 짐작이 간다. 남미를 깊이 보려면 그들의 역사, 식민지를 겪으며 고통당한 경험을 조금이라도 살피고 보면 더욱 좋을 듯하다. 사진들이 압권이다. 커다란 크기에 시원한 경치가 가보지 못한 서운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코스타리카의 몬테베르데 자연보호구역, 사진으로 보아도 좋다. 나는 겁이 많아서 그곳까지 간다고 해도 나이트 워킹 투워든 한낮의 탐험이든 한다고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모친은 따라 나선다. 원시림처럼 울창한 숲이 천혜의 땅임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알렉스의 삶의 자세가 인상적이다. 자기 일에 몰입하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본다.

  갈라파고스, 얼마나 환상적이면 갈라다이스라 표현했을까. 불편함과 과다한 듯한 돈의 지출을 치루고 간 곳, 그럴만하다는 수긍을 한다. 물개와 돌고래와 바다거북, 동식물과 인간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곳, 그런 곳이니 철저히 보존하고 그런 삶일 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곳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태초의 에덴동산과 짝을 이룰만한 곳이라 여겨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나에게 책의 사진으로 본 가장 황홀한 두 곳은 우유니 소금사막과 살바도르 달리이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지상에 있는 곳 같지 않다. 살바도르 달리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거대한 동화 속 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어느 곳에선가 어린 왕자가 아장아장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내 게으른 성격은 그런 때에도 드러나서 사진으로 보기는 더없이 좋지만 가라고 하면 즐겁지 않을 것 같다. 글쓴이 모자의 여행을 읽으면서 그들의 적극적이고 대담함이 부럽다. 딸들이 남미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면 나는 가능하면 가지 않겠다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거절할 것 같다.

  그들은 1400km 떨어진 남미의 빙하를 보기위해 아르헨티나의 엘 칼라파테로 가기위해 무려 32시간 가야하는 버스를 탄다. 어떤 여행자는 78일간 178시간 동안 9500km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탔단다. 여행을 아주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고문일 거다. 예전에 14시간가량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다. 못할 일이었다. 지루함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보면 오 분, 십 분을 넘지 않아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나타난 페리토 모레노 빙하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란다. 한 시간투어에 일인당 15만원이지만 모친의 주장으로 잊지 못할 빙하체험을 한다. 못 말리는 이들이요, 대단한 어머니다. 글쓴이보다 그 모친이 더욱 놀랍고 대단하다.

  남극을 일반인이 갈 수는 없단다.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한단다. 그들은 그 대신에 조금이라도 남극에 가까이 가보고 그곳의 상징인 펭귄을 보려고 마르티요 섬으로 간다.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이 살고 있는 곳, 모자의 남미 여행이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하듯이 펭귄의 향연이 베풀어지는 곳, 그곳에서 어머니는 이쯤이면 된 것 같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하는 종결선언을 한다.

  그 긴 여행을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평생 이야기하고 힘들 때마다 다시 돌아가 퍼다 써도 마르지 않을 세계를 무대로 추억꺼리를 비축해 놓은 것은 아닐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기죽지 않을 자산을 확보한 게다. 더하여 그것을 책으로 내서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사라지지 않는 보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들의 노고를 통해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이들은 최소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남미의 풍광과 그들의 경험을 나누어 받는다. 최근 들어 여행이 하나의 거대한 유행이 되었고, 지인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화제가 되었다. 세계인이 되어가는 추세이고 지구촌임을 실감나게 해 주는 일이다. 그래도 내 생각 한 구석에는 어디는 별 수 있나, 다 사람 사는데 거기가 거기지하는 후진적인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

  여러 사정으로 세계를 돌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위로하려는 방어본능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정말이지 나는 그들이 세계를 누비며 다니는 것이 크게 부럽기보다 사서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윈의 정원 - 진화론이 꽃피운 새로운 지식과 사상들 다윈 삼부작 3
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윈의 정원

현재까지 미치는 다윈의 영향력 -

 

  인류의 유구한 역사라 하려니 지구와 우주의 역사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다. 인류가 이 땅에 살아온 게 수백만 년이 되려나. 지구의 역사를 수십억 년으로 보고 있으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긴 역사라고하기에 우주의 역사가 너무 길다. 그 인류의 역사 중에도 인간의 지능이 발달해 문명을 꽃피우고 지식의 폭발이 일어난 건 얼마나 될까. 수백 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넉넉히 기원후부터 계산해도 이천 여년일 뿐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걸 밝혀내고, 다윈은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곧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주장한다. 이 혁명적 사고에 아인슈타인이 모든 게 상대적인 것 아니냐는 의견이 더해지면 현대적 사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유신론과 무신론, 자신의 기반이 어디인가에 따라 모든 것을 보는 안목이 현저히 다르다.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지향점이 다르고 바탕이 되는 근거와 그 이해가 달라진다. 그 두 사고방식은 차이가 커서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윈과 그를 추종하는 진화론자들은 그 기반이 무신론에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시대마다 다르다. 크게 보면 초창기부터 16세기 초에 이르는 긴 세월은 종교의 시대였다. 인류사가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시대를 지나 기독교의 시대에 이르는 이 시대는 마치 모든 것을 인문신학, 사회신학, 자연신학, 예술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었을 듯하다. 그 후로는 점점 짧아지는 호흡으로 철학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경영의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인류의 지식이 서서히 쌓여가던 1859년 말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고요한 정원에 던져진 폭탄이었다. 그것도 한 때 커다란 폭발음을 내고 건물 몇 채를 부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후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다윈 이후로 어느 분야도 그로부터 무관할 수 없었다. 생물학뿐 아니라 사회학과 심리학까지도 근본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저자는 생물의 역사는 유전자를 운반해온 역사로 생각한다.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이 살아남고 그것이 계속되어 형질이 변형되기까지에 이르고, 유전하지 않는 것은 밈(mime)이라는 형태를 취해서라도 후대로 내려가는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 관점에서 성적인 요소가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이 서로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도 유전과 진화의 영향이 강력하다. 남성의 경우에는 후손을 출생하기 위해 생리적으로는 한 번의 성행위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여성은 열 달에 가까운 기간을 고통과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몸속에서 길러내야 하고 출산 후에도 개체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까지 는 수년의 양육기간이 필요하고 그 대부분을 여성이 감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후손의 생산에 소요되는 물질로도 남성은 한 번의 행위에 약 3억 가량의 정자를 배출한다. 그에 비해 여성은 평생에 약 4백여 개의 난자를 생산할 뿐이다. 억 대 일에 이르는 근본적인 차이가 삶의 영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모습이 남성은 시작과 끝이 모두 생략되고 행위자체만 드러나는 포르노에 집착하는 반면에 여성들은 한 사람과의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진행되어 열매 맺는 과정이 중시되는 로맨스소설이나 드라마에 더 몰입한다고 한다. 이 두 영역의 제작과 소비가 어마어마하단다. 또한 여성은 한 이성에게 몰입하지만 남성은 태생적으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게다. 인류의 발전사를 생각하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려는 치열한 생존의 본능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아무리 이성과 지식으로는 완벽해도 그에 만족하거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과 영적인 면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 저자가 예를 든, 생닭을 사다가 그 안에 자위행위를 하고 깨끗이 씻어서 요리해 먹는다고 하면 위생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혐오스러운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남매가 여행을 떠나 숙소에서 확실히 피임을 하고 성관계를 갖고는 그 후로 더 가까워졌다고 하면 출산의 염려는 전혀 없지만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더 큰 희생과 작은 희생에 대해서도 계량적인 문제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실제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의 유무도 판단의 정확성을 가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과학적인 지식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의 지식이 어디까지 도달하려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그러한 지식의 증가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과학지식의 총아인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속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다. 이제 단편적인 분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확실히 초월하고 있다. 얼마가지 않아 종합적인 판단과 행위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초월할 것이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 빠른 발전의 속도가 인류의 미래를 불행으로 급속히 데려갈지 모른다. 브레이크 없이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인류를 멈춰줄 존재가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평가를 다윈의 방식과 달리하는, 보다 고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살아가려는 또 다른 다윈의 출현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루텐가루 2021-07-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점 만점을 못 맞을 바에야 포기하자는 얘기인가. 인류의 역사가 길지 않다면서 초창기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시간은 깁니까? 왜 인류를 싸잡아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니 타령을 하죠? 신의 답입니까, 본인의 판단입니까? 아님 바람?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자신과 공감했으면 좋겠나요? 본인이 종교를 통해 안정감을 찾고 주변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뿐이고, 영성이니 뭐니는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지적 갈증과 결핍을 채우며 삶이 충만해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종교는 과학과 갈등해야‘만‘ 합니까? 자신들의 이념, 신념, 교리와 충돌한다고 해서 어떤 학문이나 사상을 배격하는 행위를 보면, 물에 빠져서 신에게 도움을 청한 이가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신‘이 곧 자신을 도울 거라며 그냥 보내놓고 신에게 왜 도와주지 않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반증하고 토론하고 고뇌하고 실험하는 학문들에 비하면 ‘믿음‘ 하나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면서, 다른 믿음들은 왜 그리 공격하는지. ‘사랑‘을 외치면서 가장 얼굴을 잘 찌푸리고 ‘악마‘나 ‘저주‘를 입에 잘 담는 것도 종교인들 아닙니까.
 
그들이 사는 마을 - 좋은 삶을 살아낸 아미쉬 공동체의 기록
스콧 새비지 지음, 강경이 옮김 / 느린걸음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이 사는 마을(세상과 거꾸로 살기)

 

   기술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땅을 기반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기록, 그들의 삶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현대의 기술 자본주의가 원체 촘촘하고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다수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달려가고 국가라는 권력과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이 힘을 더해주고 있으니 맞설 상대가 없을 듯하다.

   여름철 홍수 같은 이 거대한 흐름에 맞서 조용히 자신들의 삶을 사는 이들이 아미쉬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요란스레 홍보를 하거나 알아달라고 사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잡지 플레인(Plain)을 구독하려해도 현대기술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고 수작업에 의존해 일정부수 이상을 발간하지 않는다.

   이 질풍노도와 같은 기술문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이나 짐승을 이용한 힘이 아닌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산업혁명과 만날 것이다. 기계의 힘을 빌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일에 재미를 들인다. 힘의 경쟁, 기술경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한 때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기술의 진보는 생산량의 확대를 가져왔고 자연히 소비시장이 문제가 되었다. 기계의 발전과 나란히 무기의 개량도 이루어졌다. 쇠를 다루는 기술과 속도를 높이는 면에서 산업혁명을 겪은 유럽의 국가들은 여타지역의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료의 산지와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확보한 동력과 기술을 사용했다. 평온했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은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재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겪은 국가들은 서둘러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 길만이 살 길이었다. 기술의 습득을 위해 학교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기술교육을 받은 이들은 공장으로 상징되는 산업현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럽은 유럽대로 달리기 시작한 산업발전에 채찍을 더해 가속화하고 따르는 이들은 생명을 걸고 쫓아가는 길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땅을 기반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삶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산업시설이 갖춰진 도시로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와 비례하여 도시는 급격히 팽창하고 농촌을 비롯한 시골은 인구가 급감해갔다. 텅 비어버린 시골에서 생업을 중심으로 했던 지역의 공동체문화는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골의 삶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도시는 집단거주지를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될 수 없었다. 삶을 함께 하지 않는 곳에 문화가 생겨날 수 없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의식하지 못한 채 공유하는 시간은 없어지고 집은 삶의 현장으로 가기위해 각자의 방에 몸을 눕혔다 일어나는 공간이 되고 가정은 상실되었다.

   지식과 기술의 증가로 학습량이 늘어나 교육기간이 길어지고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가 중요해졌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학습시간이 늘어나고 비용이 증가해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 기업은 이미 국경을 넘어 경제의 중심이 되고 일정한 권력을 확보했다. 많은 관계가 경제를 기반으로 틀어져갔다. 학교도 병원도 행정기관도 경제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모두가 경영자의 관점에서 소비자를 대하듯 한다. 최근의 세계 각국 선거의 최대화제는 민주화나 인권이 아니라 경제다.

   이 흐름을 이용하고 조장하는 힘이 언론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영상매체들은 이러한 사상과 가치체계를 알리고 확대 재생산한다. 오늘날 성공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들은 이런 매체들을 잘 이용하고 노출빈도가 높은 이들이다. 매체와 그들은 서로 이익을 좇아 돕는다. 병원과 제약회사와 의학계도 같은 방법으로 성공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체제,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폭주차량을 멈출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이 흐름을 멈추게 하자는 이들이 아미쉬 집단이다. 기계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으니 그 사용을 멈추든지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삶의 기반으로서의 땅을 떠나 이루어진 일이니 땅으로 돌아가 살자는 몸짓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옳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소수라는데 있고, 너무도 철저하고 촘촘하게 시장중심의 자본주의에 얽혀 있다는데 있다.

   다수의 물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선택을 수시로 긍정하고 후원해줄 동료들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낮아짐이 요구된다. 자연계의 순환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과 함께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고 그것은 다시 식물의 자양분이 된다. 한 생물종의 배설은 다른 종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되고 한 종의 개체가 과도히 많아지면 생태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자연계의 막내로 등장해 온갖 포악과 횡포를 부려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서도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착각한다. 이런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겸손히 지극히 작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자연에 순응하며 살자는 것이 아미쉬들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더 이상 남겨진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시장과 기계의 흐름 속에 파멸을 맞을 것인가. 외로운 선택을 할 것인가. 쉽지 않다. 간단하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찌할거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