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마을 - 좋은 삶을 살아낸 아미쉬 공동체의 기록
스콧 새비지 지음, 강경이 옮김 / 느린걸음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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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마을(세상과 거꾸로 살기)

 

   기술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땅을 기반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기록, 그들의 삶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현대의 기술 자본주의가 원체 촘촘하고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다수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달려가고 국가라는 권력과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이 힘을 더해주고 있으니 맞설 상대가 없을 듯하다.

   여름철 홍수 같은 이 거대한 흐름에 맞서 조용히 자신들의 삶을 사는 이들이 아미쉬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요란스레 홍보를 하거나 알아달라고 사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잡지 플레인(Plain)을 구독하려해도 현대기술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고 수작업에 의존해 일정부수 이상을 발간하지 않는다.

   이 질풍노도와 같은 기술문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이나 짐승을 이용한 힘이 아닌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산업혁명과 만날 것이다. 기계의 힘을 빌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일에 재미를 들인다. 힘의 경쟁, 기술경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한 때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기술의 진보는 생산량의 확대를 가져왔고 자연히 소비시장이 문제가 되었다. 기계의 발전과 나란히 무기의 개량도 이루어졌다. 쇠를 다루는 기술과 속도를 높이는 면에서 산업혁명을 겪은 유럽의 국가들은 여타지역의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료의 산지와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확보한 동력과 기술을 사용했다. 평온했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은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재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겪은 국가들은 서둘러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 길만이 살 길이었다. 기술의 습득을 위해 학교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기술교육을 받은 이들은 공장으로 상징되는 산업현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럽은 유럽대로 달리기 시작한 산업발전에 채찍을 더해 가속화하고 따르는 이들은 생명을 걸고 쫓아가는 길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땅을 기반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삶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산업시설이 갖춰진 도시로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와 비례하여 도시는 급격히 팽창하고 농촌을 비롯한 시골은 인구가 급감해갔다. 텅 비어버린 시골에서 생업을 중심으로 했던 지역의 공동체문화는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골의 삶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도시는 집단거주지를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될 수 없었다. 삶을 함께 하지 않는 곳에 문화가 생겨날 수 없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의식하지 못한 채 공유하는 시간은 없어지고 집은 삶의 현장으로 가기위해 각자의 방에 몸을 눕혔다 일어나는 공간이 되고 가정은 상실되었다.

   지식과 기술의 증가로 학습량이 늘어나 교육기간이 길어지고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가 중요해졌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학습시간이 늘어나고 비용이 증가해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 기업은 이미 국경을 넘어 경제의 중심이 되고 일정한 권력을 확보했다. 많은 관계가 경제를 기반으로 틀어져갔다. 학교도 병원도 행정기관도 경제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모두가 경영자의 관점에서 소비자를 대하듯 한다. 최근의 세계 각국 선거의 최대화제는 민주화나 인권이 아니라 경제다.

   이 흐름을 이용하고 조장하는 힘이 언론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영상매체들은 이러한 사상과 가치체계를 알리고 확대 재생산한다. 오늘날 성공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들은 이런 매체들을 잘 이용하고 노출빈도가 높은 이들이다. 매체와 그들은 서로 이익을 좇아 돕는다. 병원과 제약회사와 의학계도 같은 방법으로 성공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체제,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폭주차량을 멈출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이 흐름을 멈추게 하자는 이들이 아미쉬 집단이다. 기계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으니 그 사용을 멈추든지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삶의 기반으로서의 땅을 떠나 이루어진 일이니 땅으로 돌아가 살자는 몸짓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옳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소수라는데 있고, 너무도 철저하고 촘촘하게 시장중심의 자본주의에 얽혀 있다는데 있다.

   다수의 물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선택을 수시로 긍정하고 후원해줄 동료들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낮아짐이 요구된다. 자연계의 순환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과 함께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고 그것은 다시 식물의 자양분이 된다. 한 생물종의 배설은 다른 종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되고 한 종의 개체가 과도히 많아지면 생태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자연계의 막내로 등장해 온갖 포악과 횡포를 부려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서도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착각한다. 이런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겸손히 지극히 작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자연에 순응하며 살자는 것이 아미쉬들이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더 이상 남겨진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시장과 기계의 흐름 속에 파멸을 맞을 것인가. 외로운 선택을 할 것인가. 쉽지 않다. 간단하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찌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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