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정원 - 진화론이 꽃피운 새로운 지식과 사상들 다윈 삼부작 3
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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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정원

현재까지 미치는 다윈의 영향력 -

 

  인류의 유구한 역사라 하려니 지구와 우주의 역사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다. 인류가 이 땅에 살아온 게 수백만 년이 되려나. 지구의 역사를 수십억 년으로 보고 있으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긴 역사라고하기에 우주의 역사가 너무 길다. 그 인류의 역사 중에도 인간의 지능이 발달해 문명을 꽃피우고 지식의 폭발이 일어난 건 얼마나 될까. 수백 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넉넉히 기원후부터 계산해도 이천 여년일 뿐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걸 밝혀내고, 다윈은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곧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주장한다. 이 혁명적 사고에 아인슈타인이 모든 게 상대적인 것 아니냐는 의견이 더해지면 현대적 사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유신론과 무신론, 자신의 기반이 어디인가에 따라 모든 것을 보는 안목이 현저히 다르다.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지향점이 다르고 바탕이 되는 근거와 그 이해가 달라진다. 그 두 사고방식은 차이가 커서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윈과 그를 추종하는 진화론자들은 그 기반이 무신론에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시대마다 다르다. 크게 보면 초창기부터 16세기 초에 이르는 긴 세월은 종교의 시대였다. 인류사가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시대를 지나 기독교의 시대에 이르는 이 시대는 마치 모든 것을 인문신학, 사회신학, 자연신학, 예술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었을 듯하다. 그 후로는 점점 짧아지는 호흡으로 철학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경영의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인류의 지식이 서서히 쌓여가던 1859년 말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고요한 정원에 던져진 폭탄이었다. 그것도 한 때 커다란 폭발음을 내고 건물 몇 채를 부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후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다윈 이후로 어느 분야도 그로부터 무관할 수 없었다. 생물학뿐 아니라 사회학과 심리학까지도 근본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저자는 생물의 역사는 유전자를 운반해온 역사로 생각한다.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이 살아남고 그것이 계속되어 형질이 변형되기까지에 이르고, 유전하지 않는 것은 밈(mime)이라는 형태를 취해서라도 후대로 내려가는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 관점에서 성적인 요소가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이 서로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도 유전과 진화의 영향이 강력하다. 남성의 경우에는 후손을 출생하기 위해 생리적으로는 한 번의 성행위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여성은 열 달에 가까운 기간을 고통과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몸속에서 길러내야 하고 출산 후에도 개체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까지 는 수년의 양육기간이 필요하고 그 대부분을 여성이 감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후손의 생산에 소요되는 물질로도 남성은 한 번의 행위에 약 3억 가량의 정자를 배출한다. 그에 비해 여성은 평생에 약 4백여 개의 난자를 생산할 뿐이다. 억 대 일에 이르는 근본적인 차이가 삶의 영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모습이 남성은 시작과 끝이 모두 생략되고 행위자체만 드러나는 포르노에 집착하는 반면에 여성들은 한 사람과의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진행되어 열매 맺는 과정이 중시되는 로맨스소설이나 드라마에 더 몰입한다고 한다. 이 두 영역의 제작과 소비가 어마어마하단다. 또한 여성은 한 이성에게 몰입하지만 남성은 태생적으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게다. 인류의 발전사를 생각하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려는 치열한 생존의 본능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아무리 이성과 지식으로는 완벽해도 그에 만족하거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과 영적인 면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 저자가 예를 든, 생닭을 사다가 그 안에 자위행위를 하고 깨끗이 씻어서 요리해 먹는다고 하면 위생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혐오스러운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남매가 여행을 떠나 숙소에서 확실히 피임을 하고 성관계를 갖고는 그 후로 더 가까워졌다고 하면 출산의 염려는 전혀 없지만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더 큰 희생과 작은 희생에 대해서도 계량적인 문제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실제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의 유무도 판단의 정확성을 가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과학적인 지식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의 지식이 어디까지 도달하려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그러한 지식의 증가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과학지식의 총아인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속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다. 이제 단편적인 분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확실히 초월하고 있다. 얼마가지 않아 종합적인 판단과 행위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초월할 것이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 빠른 발전의 속도가 인류의 미래를 불행으로 급속히 데려갈지 모른다. 브레이크 없이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인류를 멈춰줄 존재가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평가를 다윈의 방식과 달리하는, 보다 고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살아가려는 또 다른 다윈의 출현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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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텐가루 2021-07-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점 만점을 못 맞을 바에야 포기하자는 얘기인가. 인류의 역사가 길지 않다면서 초창기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시간은 깁니까? 왜 인류를 싸잡아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니 타령을 하죠? 신의 답입니까, 본인의 판단입니까? 아님 바람?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자신과 공감했으면 좋겠나요? 본인이 종교를 통해 안정감을 찾고 주변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뿐이고, 영성이니 뭐니는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지적 갈증과 결핍을 채우며 삶이 충만해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종교는 과학과 갈등해야‘만‘ 합니까? 자신들의 이념, 신념, 교리와 충돌한다고 해서 어떤 학문이나 사상을 배격하는 행위를 보면, 물에 빠져서 신에게 도움을 청한 이가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신‘이 곧 자신을 도울 거라며 그냥 보내놓고 신에게 왜 도와주지 않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반증하고 토론하고 고뇌하고 실험하는 학문들에 비하면 ‘믿음‘ 하나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면서, 다른 믿음들은 왜 그리 공격하는지. ‘사랑‘을 외치면서 가장 얼굴을 잘 찌푸리고 ‘악마‘나 ‘저주‘를 입에 잘 담는 것도 종교인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