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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역설 -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했다
김근 지음 / 삼인 / 2009년 11월
평점 :
김근 교수의 저서 <한자의 역설>은 한자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중국의 거대 통일 국가와 권력 구조를 지탱한 이데올로기 장치였음을 서양 철학적 시각으로 파헤친 인문서이다.
방언이 극심한 대륙에서 표의문자(이미지 소통)인 한자가 통일성을 유지하는 기제가 되었음을 논한다. 통치 계급이 관념적 틀(예: '정치(政)'에 '바를 정(正)'을 더해 세금 징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은폐)을 한자에 심어 대중의 무의식을 지배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자형학적 분석(설문해자 등)에 머물던 전통 방식을 탈피했다. 라캉의 욕망 이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헤겔의 변증법 등 서양 현대 철학을 결합하여 동양 고전과 문자를 '문화 이데올로기'로 재해석하는 학문적 시도가 흥미롭다.
나아가서 극단적 논리(디지털)를 추구하는 현대에 비논리적 기호(이모티콘, 로고)로 회귀하는 현상을 짚어내며, 한자의 표의성이 가진 시공간 초월적 힘과 역설의 패러다임을 규명하였다.
책에 대한 비판적 관점 및 한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 철학 프레임의 과도한 대입 (과잉 해석의 위험)
한자의 생성과 발전은 고대 중국의 기후, 사회 구조, 실용적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게 라캉의 '욕망'이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같은 서양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프레임으로만 재단하려다 보니, 문자 고유의 자율적 발전 과정이 왜곡되거나 과잉 해석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둘째,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편향성 (한자의 도구화)
저자는 한자를 권력이 백성을 억압하고 환상을 제조하는 '지배 헤게모니의 기획물'로 주로 묘사한다. 하지만 한자는 민중의 삶, 문학적 유희, 일상적 소통 속에서 피어난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한자의 지배 담론적 성격을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문자가 가진 민중적·수평적 소통의 역사적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셋째, 서술의 파편성과 논리적 비약
언어학적 미시 분석(음절, 성조 등)과 거시 철학(헤겔, 라캉)을 번갈아 보여주는 '퓨전적 서술'은 신선하지만, 개별 장들 사이의 논리적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고 서술이 파편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구체적인 문자학적 근거에서 거대한 철학적 결론으로 넘어갈 때 발생하는 귀납적 논리의 비약은 학술적 엄밀성 면에서 약점으로 꼽힐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자의 구성원리 육서 중 전주와 가차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고, '음동의근'을 비롯하여 한자의 의미 체계가 한어(중국어)의 음운 체계의 질서대로 짜여 있음을 분석한 부분은 참으로 탁월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