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스코트 새비지 엮음, 김연수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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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제목부터 심상치가않다. 그도 그럴것이 아침에 출근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하는 일이 컴퓨터 전원을 켜는 것이며 퇴근할때 마지막으로 하는 일 또한 컴퓨터 전원을 끄는 것, 그리고 집에 오면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컴퓨터를 부팅하는 나이기에...

이 책은 미국의 전통 공동체로 유명한 아미쉬의 잡지인 Plain에 실린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떤 유명한 지식인의 대단한 사상이라던가 이론은 없다. 그저 일반인들과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 모음이다. 하지만 그간 나를 사로잡았던 어떤 문제의식을 담은 다른 글들보다 더욱 내게 긴 여운을 남긴다. 어느새 나는 하루종일 인간이 아닌 기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어느새 나는 닭장같은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 여기고 있으니까..

뛰는 것은 힘이 든다. 그러면 왜 그렇게 힘들여 뛰고 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의 유일한 잣대로 여겨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성공이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가끔씩 의문이 들 때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추겨가며 뛰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번 이 책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 좀더 편한 삶을 살려고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손으로 빨래를 하는 대신 세탁기를 쓰기 위해서. 만약 지금 하는 일이 나의 몸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면 그걸 견디며 세탁기를 사는 대신 그냥 손빨래를 하는 것은 어떨까.

현대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똑똑하고 고차원의 일을 하고 산다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의식주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 외에 우리는 정말 무능력자들이다. 자연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사는 지혜로운 생활면에서는 무언가 좀 부족하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은 할 줄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밭을 가꾸며 자신들이 먹을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옷감만 있다면 입을 옷을 만드는 것 또한 가능하다. 빨래는 손으로 되도록 물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한다. 햇빛이 다 말려주니까 굳이 빨래를 꼭 짤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돕는 것은 필수다. 음식은 넉넉히 해 나눠먹고 유용한 도구는 같이 쓰고 자기만의 기술로 이웃을 돕는 것. 기계가 아닌 서로에게 의지하는 공동체 삶이다. 그들은 TV와 라디오가 없어도 서로 대화를 통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당장에 이 사람들처럼 현대 기술을 거부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를 꾸려보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여유도 없이, 숨가쁘게 돈과 기계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메세지는 매우 강렬하게 다가갈 것이다.

TV, 핸드폰, 컴퓨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지는 광고와 상업적 메시지에 대부분의 시간과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들.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끌려다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적게 소유하고 많이 존재하기'는 어떨까? 그런 것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가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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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 자비의 사회화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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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알던 스님께서 막사이사이상을 받으시고 난 후 그 동안의 활동과 수행한 바를 정리한 책이라고 해서 짚어들었는데, 실용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새롭게 생각할 꺼리를 푸짐하게 던져준 책이었다.

이 책은 일상에 있는 일을 중심으로 그 구조와 논리를 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인데,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정리된 책이다. 흔히 스님들의 법문은 선문답하는 형식이라고 하는데, 법륜스님의 법문은 적합한 예시를 섞은 논리적인 법문이라고 정평이 나있다. 아무튼 보기 드물게 논리적인 스님의 글이어서 생경하지 않음이 책읽는 내내 유지돼서 좋았다.

보통 평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인간관계에 국한하여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갈등에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갈등도 포함된다. 이것을 환경문제라고 한다. 단순한 환경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문제로 보아서, 서로 다름은 알고 인정하는 길, 서로 하나임을 알고 상생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에 환경문제를 제기했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든 안 되든 다른 생명들에게 피해가 된다면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인간의 의식 범위가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민운동도 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운동은 과거의 논리나 가치관에 속박되어 있지 않은가?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이나 환경운동을 막론하고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기득권에 대한 대항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상대방의 위치와 바꾸려고 하는 식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쨌거나 기존의 사고틀로만 바라보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롭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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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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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인 제목인 오래된 미래는 저자가 이책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함축적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화 산업화가 전통적인 가치나 지역공동체, 혹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면서 기존의 가치들이 어떻게 변화되는 가를 찬찬히 더듬으면서 성장지상이나 개발, 서구의 삶의 양식들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거나 혹은 그것이 초래하는 위험한 삶에 대해서 반성해보게 하는 계기를 주고 있다.

제1부에서 소개된 라다크의 전통적인 삶은 눈을 감고 상상해보아도 절로 행복해지는 상상을 안겨준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나는 어렸을 때의 나의 삶을 유추해보아서 더더욱 행복했을 수도 있다. 일년중 4개월 일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느슨하고 천천히 살아가는 방법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며, 오래되었지만 미래의 삶의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약속시간을 '해지고 난 다음 잘 때까지'정하고 사는 삶. 혹시 우리에게도 주어졌던 삶의 방식이었는데 서구가 주는 문명의 방식에 도취되어 스스로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제한된 자원을 조심스럽게 쓰는 것은 인색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저자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혹은 내가 저자의 가치에 동의할 용기가 있는가?

또한 저자는 제2부 변화의 과정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인정받던 가치들이 미개나 저발전으로 전락해버리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라다크의 변화과정이 상당히 많은 부분 우리의 삶과 일치해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일상을 반추해 보았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소시지를 접하던 기억이 나는 것은 서구화된 문명의 가치를 지향하며 억지로 소시지를 입맛에 길들이기까지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변화의 과정에서 자연가치를 한정된 대상으로 보지 않고 개발에 혈안이 되어있으며, 경제지표라는 숫자에 얽매여 소비를 가속화하고, 좀더 근사한 삶을 향해 새로운 화학물질들이 속속들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도 3부에서 '흙백의 논리를 넘어서' 소개했던 것처럼 전통사회 속에서 추구해야할 가치와 개발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힌 사회가 가능할 것인가? 혹은 숨가쁘게 달려왔던 우리사회에서 지금까지의 형성된 발전의 가치를 포기하고 대안으로 다시 전통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에 대한 합의가 가치판단이 다시 되어야 할까? 역시 그런 사회가 도래한 데도 자연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사회에 대한 한계를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과 전통사회를 향한 행복한 동경이 내의식에 맞닿아 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제기되는 있는 친환경적인 삶의 대안들이 통합적이고 건강한 방식으로 발현되기 위해서 사회의 틀은 재편성 되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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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의 숲을 찾다 -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
요코가와 세쯔코 지음, 전홍규 옮김 / 이후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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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가와 세쯔코는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는 자연과 문화적 유산의 파괴에 대한 보존, 유지 노력은 비단 내셔널트러스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음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숙명적인 문제일 것이다. 이를 저자는 일본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 소개 속에서, 오사라기 지로우의 말을 빌어서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일본인은 자연을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알려져 왔다. 어쩌면 이것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자기 집안의 나팔꽃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공의 자연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사라기 지로우의 말은, 바로 우리가 누리는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이 지니는 공공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개개인에게는 그다지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는 자연과 문화유산의 파괴가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작금의 현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자연과 문화유산의 공공성문제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식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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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시 히로유키 외 지음, 이하준 옮김 / 경당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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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일본인이 공저한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는 사람들에게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환경의 근본 성을 보다 덜 전문적이고 보다 덜 심각하게 인식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바꾸는 가장 큰 힘은 인간 자신도 아니고 경제 체제도 아닌 바로 인간 주위의 환경이라는 어찌 보면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과연 세상을 바꾸는 힘이 무엇이었는가를 되살펴 보면 신격화된 자연에서 종교적인 신으로 종교화된 신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다시 경제체제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만큼은 못한 상황에서도 경제체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해서 환경문제를 인식의 전환으로 풀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체제선택의 문제로 풀어가려고 하는 부분이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것 같다.

이 서명의 저자들은 이러한 체제선택의 지루한 과정 대신 보다 큰 줄기에서 환경이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을 각각 고고학과 역사학의 입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헤어 스프레이를 쓰면 오존층에 구멍이 뚫린다는 식의 나비효과를 전파하는 것은 아니고 두 가지 환경자원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삼림과 물이다.

이들은 고대중국문명의 소멸과 로마제국의 멸망, 중세 유럽의 대외진출, 산업혁명을 이룬 화석연료사용의 출현 등을 모두 삼림과 물을 모태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중국 문 염의 소멸은 왕들의 무덤 등을 만들기 위한 과다한 삼림의 훼손이 불러온 홍수에서 그 맥을 찾고 있고 로마제국의 멸망은 삼림파괴로 인한 물 부족에서 그 답을 구하고 있으며 화석연료의 출현은 연료로서의 삼림 감소가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나름대로 답을 내리고 있다.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각종 정신문명의 발전과 변화도 숲의 울창함과 빈약함에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일신교가 아닌 다신교는 대체로 숲이 울창한 지역에서 발생하고 번성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본인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이제 경제체제를 가지고 사회를 논하던 그런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한 애수가 남아있는 본인에게는 불편한 느낌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경제체제만을 논해서는 안 되는 그런 시대가 와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체제 신봉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환경론자들이 환경의 근본 성을 주장할 때 그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떠밀었던 사람 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이 바뀌었을 뿐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기본 컨셉은 바뀌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나름대로 자위해본다. 이런 약간 불편한 감정 뒤에 찾아온 느낌은 왜 우리나라의 지리학과 고고학에는 이런 종류의 책이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언제나 한발 늦게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혹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나와서 우리나라 환경사의 선두 적인 책이 나왔다고 한다면 우리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라는 말로 분발을 요구할 준비를 해야 할거 같다.

인간의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나에 책읽기는 조소에서 실망으로 다시 실망에서 희망으로 변하는 그런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아마 2-3년전이었더라면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가 라는 질문에 서스름없이 부당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사회주의라고 답했겠지만 이제 그 답을 바꾸어야 할거 같다. '체제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닌 문제의 근본 인식에 대한 차이이고 가장 최종적인 인식은 바로 환경에 대한 인식이다'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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