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소녀
다이도 다마키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살아있는’ 여자의 이야기
다이도 다마키의 《불량소녀》 서평


다이도 다마키의 《불량소녀》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주류적인’ 이미지의 사춘기를 보내지 않는다. 친구나 부모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받지 않으며, 지식의 습득에 관심이 없고, 새로운 집단으로 들어가서 인간관계를 넓히지도 않는다. ‘사춘기’하면 으레 떠올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열정적인 반항도 없다. 때문에 그녀들의 사춘기에는 성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자라’의 마루코가 어렸을 때 자신을 성적으로 놀리고 학대한 사촌 남자들을 피해 고향을 떠난 모습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러나 그녀가 고향을 떠난 것도 성장에 의한 발전보다는 회피적인 느낌이 강하다.

성장에 대한 갈망이나 열정이 없는 대신 소설은 일상 속에서 전달되는 미묘한, 정서적인 충격에 대한 세밀한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일상은, 어른이 되어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픈 것도 아닌 복잡한 흐름이다. 인간관계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자매 사이 혹은 엄마와 딸 사이라고 해서 늘 좋을 수는 없다.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함께 밥을 먹으면서 웃는다. 그녀들은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 마음이 찡해지는 위안을 얻기도 하고, 혼자서 술에 취한 채 쓸쓸하게 쓰러지기도 한다.

《불량소녀》의 주인공은 스스로 ‘불량소녀’라는 명칭에 맞지 않게 불량스러운 짓을 하지 않고, 혼자서 지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지닌 수수께끼 중의 하나도 전혀 분수를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물 흐르듯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 같은 담담함은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정서적인 충격을 차분하게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모가 아버지와 성적 관계를 맺은 일화나,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심하게 맞았는데 언젠가 엄마를 세게 때리고 나니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 거식증에 시달려서 토사물을 대야에 숨겨놓는 사촌의 이야기, 언젠가 죽어버릴 것 같은 할머니의 모습이 틱 증상과 아토피성 피부염, 어둠 공포증, 야뇨증과 같은 어린애들이나 갖고 있음직한 병을 앓는 주인공의 상황과 어우러진다.

‘불량소녀’의 모습은 ‘자라’에서 여러 고장과 직장을 전전하면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마루코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남존여비를 당당하게 외치는 할아버지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여자들, 소녀 마루코의 옷을 강제로 벗기는 남자사촌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골에 대한 표면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깨뜨린다. 마루코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지만 고향에서 안부전화가 오면, 마치 집을 떠난 강아지처럼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마음이 흔들린다. 고향은, 따뜻한 감정과 쓰라린 감정이 뒤섞인, 완벽하게 지워버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가 일하는 직장 역시 고향과 다를 바 없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서도, 막상 마루코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주인은 가끔 마루코의 몸에 손을 대고, 함께 일하는 직원 누마다와 가와라는 시시콜콜 질문을 하면서 독신으로 사는 마루코를 어린 여자취급을 한다.

결말에서 술을 마시고 거울을 보며 “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마루코의 모습,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할머니의 집에 엄마, 언니와 함께 모여서 가슴 찡한 기분을 맛보는 ‘불량소녀’의 주인공 모습은 인상적이다. 신장염이 도졌으며 직장마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마루코의 상황이나,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불량소녀’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희망 혹은 절망, 사랑과 우정 혹은 어떤 단단한 자의식적 세계관 없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변화하는 일상의 순간적인 이미지들이 모여서 희극 혹은 비극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려운, 입체적인 감각들이 살아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소녀시절을 훌쩍 넘어야 생겨날 수 있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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