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상신서 1
에리히 프롬 지음 / 범우사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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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프롬은 사람들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듯하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전시대에 살았던 I. 칸트에게도 있었는데, 칸트는 인간 인식의 과정에 대한 사고를 뒤집어 설명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내가 보기엔 프롬도 현대인이 생각하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 그러한 전환적인 사고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프롬은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서 나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자유로운가?'

중세는 신의 세기이다. 그러한 중세에 개인은 자유롭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아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개인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인간의 삶은 정형화되어 있고 개인으로서 직면하게 되는 선택의 고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예술, 문화, 철학 등등- 인간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 시작하고 신에 의해서 사라졌던 것은 사실이다. 15세기 이후로 중세가 막을 내리자 사람들은 모두 자유를 얻었다고 외쳤다. 그러나 어떠한 자유인가?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그토록 잔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이 자유는 겨우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일 뿐이다. 프롬의 표현대로라면 '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인 것이다. 그러한 자유를 얻은 인간은 또 다른 곳에 얽매이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안전'에로의 도피이다.

신에서의 탈출은 동시에 혼돈의 세계로의 입문이다. 뒤르케임의 '아노미'로도 표현될 수 있는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 인간은 '안전'을 위해서 또다른 힘(그것이 비록 신은 아닐지라도)에 의탁하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를 고독과 불안 속에 내버려두게 되어 그는 개인적 무의미성과 무력감에 압도당하고 만다. 즉, '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는 사실 또 다른 억압이다. 이와 같은 개인에서 강력한 국가의 힘은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프롬은 이 책의 6장에서 나치즘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로 위와 같은 개인의 특성을 들고 있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 -에로의 자유(freedom to)'로써 확립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음과 동시에, 서구 사회의 이상인 개인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자유가 확립된 적은 없는 듯 하다.

나는 7장에서 제시한 교육방법의 문제점에 대한 프롬의 견해를 지지한다. 그가 제시한 독창적인 사고를 저해하는 교수법은 진실로 이제까지의 상대론과 절대론의 철학적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인정해주고 싶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교육방법 중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일이다. 사실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과 진리에 도달하는 것과의 차이점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진리를 상대적(마치 윤리학에 있어서 정서주의-Emotivism-와도 같이)으로 보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진리를 완전히 주관적인 문제로, 거의 취미나 기호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이런 상대주의의 결과는 사람의 욕망과 관심을 상실시키게 되며, 그 대신 여러 사실을 기록하는 하나의 기계(자동인형)가 되어 버린다.

'-에로의 자유(freedom to)'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으로서 가능한 가장 강력한 신념, 즉 생명과 진리 그리고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고도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인민들에게 고취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허무주의(이름뿐인 자유)의 힘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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