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CCTV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는 큰 이슈를 일으키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과거 역사의 큰 획을 그은 9개 나라(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 )의 부국과 쇠퇴를 따라가며 무엇이 그 나라를 발전시키고 무엇이 그 나라를 쇠퇴하게 했는지 말하고 있다. 간단히 9개 나라의 발전 스토리를 살며 보고 이를 통해서 강대국으로 가는 조건을 살펴보자. 그리고 이것들은 결국 우리 기업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역사와 다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 기업의 부흥의 조건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거를 통하여 미래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1. 포르투갈과 스페인 : 해양의 시대를 열다.
2. 작은 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
3. 영국, 현대화의 선에 서다.
4. 영국, 세계최초의 공업화 대국
5. 프랑스, 혼돈 속에서 일어서다.
6. 독일, 유럽제국을 이루다.
7. 일본, 대국을 향한 백년간의 유신
8. 러시아, 강대국을 향산 긴 항해
9. 소련, 풍운 속의 새로운 길
10. 미국,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꿈
11. 미국, 세계 제 1 강국을 위한 새로운 도전
12. 21세기 대국의 길
1. 포르투갈과 스페인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 서남단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겨우 인구 100만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한쪽에는 프랑스와 맞대고 있고 나머지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한국과 같은 국토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으로 빈곤과 낙후적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왕이 엔리케 왕자 (1394~1460)이다. 이 왕은 미래의 포르투갈의 미래가 바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많이 사용되던 향신료는 육지 길은 이미 다른 나라들에의 하여 선점당하여 가격이 급증하여 많은 피해를 봐야했다. 왕은 신항로 개척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주관함으로써 해양 강국이 되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나침반을 개선하고 배의 돋을 2~3개로 추가해서 속도를 놓이며 천문학을 항해에 이용하고, 해양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도 설립한다. 이런 국가적인 차원의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졌고 많은 새로운 바다 길과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도 여왕이 있었으니 이사벨1세 이다. 스페인을 통일하고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대규모 항해가 시작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이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이사벨1세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가져다주는 큰 부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고 아시아를 발견(1492)하게 된다. 이렇게 해상 강국을 이루어낸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해양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게 되고 결국 양분하여 관리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 두 나라들은 신항로 개척과 새로운 식민지 확장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자국 상, 공업 발전을 등한 시 하게 된다. 기존 권력층의 이익 보전에 긍긍하고 신항로 개척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고 국내 산업은 계속적으로 위축되어 갔다. 화폐의 가치는 하락했지만 국민 소비는 높아져 갔다. 결국 해상의 강국은 쇠퇴하고 만 것이다. 두 나라의 짧은 전성기는 이렇게 끝난 것이다.
2. 네덜란드
풍차와 튤립이 연상되는 나라는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 작은 나라지만 영토의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 많은 나라의 침략이 있었고 많은 나라들의 속국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나라 민족은 다른 강국이 가졌던 민족성들과는 다른 민족적 경향이 있었다. 영통확장과 우월 민족성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 이익, 상업적 번영에 더 중점을 둔 것이다. 이 나라는 청어가 매우 유명했고 경제의 반절이상이 이 청어의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빌렝벤켈소어'라는 어부가 개발한 청어손질용 나이프는 생선내장을 쉽게 제거하여 다른 나라들보다 저장이 오래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청어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청어 어업을 다른 나라들도 시작함으로써 어업의 영역을 넓을 필요가 있었다. 북동유럽, 영국, 남유럽, 아프리카와 무역을 개시하였고 상업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때 네덜란드는 영국이라는 큰 적이 있었다. 해상 영역권을 놓고 영국은 강한 자금력과 군력을 무기로 사용했고 네덜란드인은 경제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선박 제조기술의 발전이 그것이다. 최저비용으로 선박을 만들기 위해 무기적재를 하지 않아 경량화 하고 특별 설계를 통해서 목재 사용량을 줄임으로써 제작비용을 감소 시켰다. 이것은 해양 운송비 절감을 가져왔고 강한 경쟁력이 된 것이다. 철저한 신용과 이런 경쟁력으로 무역영역을 세계로 확대해 갔다.
한편 귀족들의 상인 세금 갈취는 심각해 져갔고 이들은 결국 귀족으로부터 자치권을 사게 된다. 이때 스페인 밑에 있던 네덜란드는 경제적 이익 계속적으로 착출 당하자 강한 반발을 일으키고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1581년 독립을 이룬 이 나라는 자기 들이 경제적 활동의 유지만을 원했고 자기 나라의 든든한 방패로 영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영국역시 계속적인 보호세 착출로 영국에 등을 돌리고 자체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아시아, 아메리카 신항해 개척을 시작했고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 최초의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로써 주식거래소가 개설되어 매매가 이루어지고 이런 부의 축적은 은행설립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제적 부만 발전시킨 나라는 다른 기타 강국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17세기 점차 쇠퇴하게 된다.
3. 영국
영국은 현대화의 선봉적인 역할을 하면서 그 위상을 높인 강국이다. 영국 역시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엘리자베스 1세 (1533~1603)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영국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노력한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드레이크"라는 탐험가가 세계 일주를 통하여 여왕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자 그 에게 기사를 하사한다. 이것은 해적이라고 볼 수 도 있는 이 탐험가가 영국의 이익을 줌으로써 명예를 얻은 사례로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위하여 바다로 나아간다. 이로써 영국은 막강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런 해상권을 이용한 부이 축적은 그 당시 해양 강국 스페인 왕인 필리페 2세는 이익을 빼앗기 위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영국에게 스페인은 패하게 되고 이것은 영국의 해상력 급증을 가져오게 된다. 강한 군주제로 계속적인 성장을 이룬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나라를 공인된 법과 규칙에 따라 통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다음 왕들은 그렇지 않았다. 찰스1세와 제임스 2세를 거치면서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 군주제로 영국은 나라 모습은 달라진다. 왕의 통치에서 법의 통치로 변화는 엄청난 역사적 변화이며 세계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영국 산업혁명의 중요한 인물이 제임스 와트(1736~1819)이다. 천재 발명가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을 개발하게 되고 '매튜볼튼'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영국은 특허제도를 만들어 과학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보호 해주었던 것이다. 이 특허제도는 영국의 과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 국민은 정치적 영웅보다는 '아이작 뉴턴'등과 같은 과학자를 영웅으로 생각했다.
이런 과학발전과 증기 기관은 대량생산을 가져왔고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 기계를 돌렸고 자유 경제에 따라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하게 됨으로써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세계 제일1의 강대국이 된다.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극심한 빈부의 차를 가져왔고 해외 식민지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됨으로써 영국에 경제적 부담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결국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고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시대가 점점 지고 있는 것이었다.
4. 프랑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프랑스는 서쪽으로 대서양을 접하고 바다를 사에 두고 영국과 마주보고 있다. 동쪽과 동북쪽으로는 독일, 스위스등과 접해있다. 프랑스는 전통 농업 중심사회로 노예제 사회와 봉건사회였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 왕이 나라를 대표하고, 왕에게 통치권이 있으며, 왕이 국가의 정신이다."라고 말하며 하부 계층을 핍박하고 세금을 과하게 징수했다. 결국 루이 16세 때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혁명이 일어났고 정부는 뒤엎어지게 된다. 프랑스대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절대왕권의 봉건성과 부패 이었다. 인구의 겨우 2%정도였던 특수계층, 즉 제1계급과 제2계급이 토지의 35%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각종 특혜와 혜택을 누렸다. 이런 특수 계층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며 국가 재정 부담은 인구의 96%인 제 3계급에게 지워졌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제 3계급 중 자본 계급이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시대 계몽사상이 지식과 천부인권사상을 전파시켰고 국가, 권력, 종교생활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또한 대혁명에 영향을 미친것이 루소 '사회계약설'이다. 이 혁명을 통해 프랑스는 국민주권이 실현되게 된다.
그 후 1804년 나폴레옹 1세(1769~1821)가 프랑스 제1공화국 황제가 된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계속적으로 승리하면서 프랑스 국민의 지지와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세계적 강국으로 만든다. 하지만 프랑스는 대혁명정신을 강조한 나라였고, 이것은 '자유, 평등, 박애'사상이 근본이 되었다. 이것은 침략한 나라에 대한 프랑스의 이중적인 모습이었고 정복된 나라들은 반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 많은 정치 변동이 이루어지고 결국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피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다. 루이 보나피르트는 경제발전에 노력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원칙을 흡수하고 거시 경제 정책을 시행한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침략을 당하게 되고 샤를르 드 골 (Charles Andr Marie Joseph De Gaulle: 1890~1970)는 프랑스 독립에 선두적인 역할을 한다. 프랑스는 알제리 자치권 인정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종결을 선포한다. 대외적으로 독일, 중국등 독립적 우호적 해외 관계를 형상한다.
6. 독일
유럽 중앙의 지리적 열세로 독일의 군력은 나날이 약해졌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점점 권력은 황제에서 제후로 옮겨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정치는 소규모 세력으로 지방 분열화로 발전해 간다. 연방 군주들은 독자적인 정치를 했고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독립적인 행정권과 사법권, 관세권, 조폐권을 시행하게 된다. 결국 1648년 베스트 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를 통하여 독일의 30년 전쟁(1618~1648)이 종식되면서 독일 분열을 공식화하게 된다. 이 30년 전쟁은 독일 인구 3분의 1을 앗아갔고, 경제 수준 역시 200년이나 퇴보 시켰다.
독일 역사에 중요한 인물인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리스트( Georg Friendrich List)이다. 리스트는 독일의 점차적 통일을 주장하면서 먼저 경제통일 후 정신 통일이 이루어 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독일 내부 관세제도로 독일 경제발전을 막고 있었다. 그는 관세동맹을 추진해고 첫 번째로 프로이센을 그의 손을 들어 주었다. '독일관세동맹'은 훗날 독일 정치저그 군사적 통일의 밑바탕이 된다.
또 한명의 위대한 정치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 1815~1898)가 등장한다. '철과 피의 제상'이라 불리며 독일 통일 시키게 된다. 독일은 국민들의 자질향상을 중요시하고 동시에 이를 국가 발전에 기초로 삼았다. 국가적으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결석 시 벌금을 부여하기도 했다. 교육에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궁전을 비우고 그곳에 대학을 만들었다. 이만큼 국가가 국민 교육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과학자의 양성에 기초가 되었고 위대한 과학자들이 배출과 함께 독일은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사회복지 제도를 실시 하여 자유경제의 폐단을 막았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동독과 서복으로 나라가 분리되고 전쟁보상금으로 나라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국민적 근본이 강한 독일은 1990년 다시 통일을 이루고 세계 강국으로써 다시 부상하였다.
7. 일본
동북아시아 지역의 작은 섬나라 일본, 우리나라와 지독한 인연과 악연이 섞여있고 또한 과거 강대국으로써 이름을 떨쳤고 지금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민족성일 것이다. 한국은 항상 방어적이고 폐쇄적인데 반해 일본은 개방적이고 공격적이다. 한국이 세계에 대한 문을 꼭 받고 문호개방하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메이지 천황 (일본 제 122대 천황) 제위 시 큰 사건이 발생한다. 미 해군의 제독 매슈 페리가 흑선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것 이다. 기로에 선 일본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고 100년간의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게 된다. 해외로 대대적 사찰단을 보내어 해외 경제, 기술, 정치를 배워 왔다. 일본은 독일 비스마르크의 정책 이념을 따라서 국가 국력을 증가를 통한 경제 발전 모색했다. 식산흥업(殖産興業 :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단기간에 서구화를 도입하고 미친 듯이 서양 문명을 받아 들였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선두주자가 오쿠보 토시미치(1830~1878)이다. 과도한 서양 문명에 대한 맹신은 일본의 전통 파괴를 가져 왔고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에 발전에 큰 역할을 했지만 반대 세력에 암살당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민주, 민권운동을 통한 계속적인 국민들의 헌법제정 요구를 받아들여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발전된 산업을 군사력 증강에 키워온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한 침략을 시작한다. 1894년 청일전쟁, 1904 러일전쟁등 전쟁을 통해서 일본은 강국으로 발전하지만, 자만에 빠진 일본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폐망에 길에 접어들게 된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카의 핵폭탄 투하로 일본의 전성기는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으로 하드웨어는 사라졌지만 소프트웨어는 살아있는 나라였다. 이것은 다시 빠른 일본의 재건과 성장을 가져왔고 현제 일본은 무서운 강대국의 위치에 다시 올라와 있다.
8. 러시아(소련)
러시아의 유명한 자가 표도로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 " 진실로 위대한 민족은 인류 역사에서 조연의 역할을 맡는 것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인공에도 만족하지 않는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유일무이한 역할이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러시아 민족은 수퍼 강국을 꿈꿨다. 러시아를 만든 위대한 인물 2명이 존재한다. 그 2명은 표토르 1세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와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Il'ich Lenin : 1870~1924]이다.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중심에 존재해있었고 주변에는 적국이 많았다. 러시아 부국을 위하여 표토르 1세는 대규모 사절단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해외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문자를 개혁하고 수염을 자르고, 복장을 양복으로 바꾸면서 서양화해 갔다. 직접 해외에 가서 선박 제조 기술을 배워 올 정도로 이 대제는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러시아 발전에 노력했다. 국가발전을 일으킨 대제는 전쟁을 통해 상트페테브르크로 수도를 이전하고 더 큰 발전을 위해 도약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인이지만 러시아인이 되려고 한 여왕이다. 그는 러시안인들을 사랑했고 국민들도 그녀를 사랑했다. 표토르 1세 상사르 이어 받은 여왕은 강한 군사력의 많은 영토를 확장하여 초 대국을 이루고 대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또한 주요도시에 4년제 학교를 세우고 각 지역의 도시마다 2년제 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유럽법( 자유, 평등, 박애)을 흡수하여 법치주의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예제도와 농도제도가 존재하는 러시아서 이 법은 현실의 벽에 붙이 친다.
19세기 중엽 주변 국가는 빠른 공업화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크림전쟁 실패후 러시아 국가 위상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크림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와의 산업 발전에 뒤처짐을 알게 되고 농노제가 산업 발전에 방해가 됨을 국민들이 인식하기 시작한다. 결국 1862년 농노제를 폐지하게 된고 이것은 러시아 발전에 엄청난 기회와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레프 톨스토이 (Lev Nikolaevich Tolstoi : 1828~1910)는 서양을 통해 자본주의 폐단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빈부의 격차를 해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러시아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레닌은 전쟁 후 기아 허덕이는 국민과 빈약한 국가 경제를 부흥하기 위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한다. 상업, 감세, 소기업의 존재를 인정하고, 곡식을 시장에서 판매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일부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은행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레닌은 미국인 아먼드 해머(1898~1990)를 이용하여 해외 무역을 활발히 하고 외국기업 인물들을 스카우트하므로써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게 했고 포드자동차의 선진 기술을 도입 자동차 생산을 하였다.
이후 스탈린(1879~1953)는 하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경제 발전 속도는 느림과 경제 방식이 달라야 함을 인식하고 국가 주도적으로 추진한 5개년 국가 경제 정책을 실시한다. 세계 대공항이 발생한 그때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러시아는 세계적인 강국으로써의 그 위상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경제 체제도 경제발전의 불균형이 발생한 는데 중공업과 군수에 집중적인 지원을 하고 경공업, 농업을 등한시하고 국민생활, 광업발전 보조가 취약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자유시장의 안정을 찾음에 따라 러시아는 다시 뒤처지는 처지에 오게 된다.
10. 미국
미국은 13개의 식민지(주)로부터 시작한다.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메릴램드, 로드아일랜드, 코너티컷, 델라웨어,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뉴욕, 뉴저지, 뉴햄프셔, 펜실베이니아, 조지아가 그것 이다. 종교적 탄압에 못이겨 청교도 102명이 신생 식민지로 이주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영국의 핍박을 견디지 못한 13개주는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다. 독립 11년 후 이 연방은 연합하지 않으면 유럽 열강에 멸망한다는 사실에 합의하게 된다. 미국 연방 헌법(1781)하고 13개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게 된다. 그 당시 국회 의장인 조지워싱턴(George Washington : 1732~1799)이 제 1대 미국 대통령이 된다.
제 16대 대통령 에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노예제도를 반대했고 이것은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북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다. 그 후 서북개척 운동을 시작한다. 10달러의 등기 비용만 내면 서부 16에이커의 땅을 5년간 경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이주했고 땅을 넓히고 경작지를 넓혀 갔다. 하지만 이것은 원주민인 인디언의 멸망위에 세워진 발전 이였다. 그 후 2차 산업 혁명을 주도하며 급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창의적인 문화와 제도를 제공함으로써 과학자, 기술자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미국은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경제의 폐단은 극심한 빈부의 차는 극심해 졌고 상위 2%에게 전체 60%의 부가 집중 되었다. 시민들은 굶주렸고 사회는 황폐해 갔다.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등장으로 미국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 승리로 큰 이익을 얻게 되고 진보운동, 포드시스템의 발전으로 미국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시장의 방임은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라는 결과를 가져 왔고 대 공항이 발생하게 된다. 이 공항은 세계적은 대 공항으로 번져 간다. 미국은 돌파구를 소련의 5개년 계획경제 정책에서 찾았다. 자유 시장은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정부가 자유 시장경제 정책에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는 안정화하기 시작했고 이제 미국은 제1의 강국이 되었다.
11. 강대국의 조건을 통해 본 우리 기업의 부흥
앞에서 우리는 9개의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살펴봄으로써 과거의 역사를 배웠다. 크게 대국의 조건은 4가지로 정리 될 것이다.
- 대국의 조건
① 강한 국민의 단결력
② 탄탄한 경제력
③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존재
④ 현대화(서구화)
물론 다양한 나라들의 환경과 민족성, 역사적 흐름 등이 국가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4가지로 딱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기업 또한 이런 나라와 같이 내부적 환경, 주변 경쟁자, 정부의 정책, 나라의 경제, 세계적인 경제의 흐름등 여러 가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발전하기 위한 기업의 조건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직원의 강한 믿음(호응)을 얻어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3가지 요소가 나타난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선천적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환경이나 노력으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문제는 자질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가이다. 자질이 없다면 그것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계속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두 번제 문제는 직원의 호응을 어떻게 얻어 내는 가이다. 이것은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자유경제 원식에 답이 있다. 회사는 러시아의 5개년 계획 경제 같은 큰 경제 정책을 제시 하고 그것에 대하 충분히 이해시키고 알려줘야 한다. 회사 정책 실패의 큰 요인은 동질감 부족이다. 왜 시행해야하는지, 왜 필요한지, 무엇이 이익인지 충분한 이해와 협의 없이 내려진 정책은 진정한 참여와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적극적인 변화와 발전에 대한 노력일 것이다. 모든 기업이 변화와 발전을 추진하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구체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일자와 책임자, 업무 능력의 한계, 책임, 성과에 대한 보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변화를 스트레스로 받아드리지 않고 발전으로 받아 드리기 위해서는 조직문화 개선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조직문화의 개선은 작은 곳에서 큰 곳 이 아니라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변화이다. 위 임원이 변해 팀장이 변하고 팀장이 변해서 조직원이 변하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팀장이다. 동일 구성원이라도 누가 팀장인 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나 조직문화가 달라진다. 기업 발전을 위해서는 기업이 이상적인 조직문화를 장려해야 하고 팀장들을 독려함으로 가능할 것이다.
항상 이상(理想)이라는 것, 이론이라는 것은 현실(現實)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것이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마르크의 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 않을까? 기업 생존을 위한 첫 걸음은 직원을 끌어안는 것이다.
기업의 위기를 공유하고 서로 이해하고 같은 방향성을 같기 위해서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그 대화는 일방적인 일방향의 대화가 아닌 쌍방향의 대화가 돼야 하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맥킨지는 한국 CEO 교육 시 CEO의 자기개발 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주로 핵심임원들 파악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
● 현장의 소리를 발로 뛰며 듣는 것.
● 여러 가지 책을 일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함으로써 넓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구축하는 것.
● 조용히 생각하며 전략을 구상하는 것.
또한 맥킨지는 "최고경영자은 이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만의 방해받지 않는 '자유시간'을 만들고 이 자유시간은 먼저 주요 임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서로를 자극하는데 투자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맥킨지도 직원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숨소리를 듣고 대화하라고 말하고 있다. 위기가 클수록 급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하고 그 대화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기업의 부흥을 위한 요소 중 중요한 하나는 바로 교육이다. 포르투칼은 해양학교를 세워 기술력을 키웠고 러시아도 4년제, 2년제 학교를 건립하고, 독일은 의무교육을 실했으며 일본은 국민 지식의 힘으로 핵폭탄을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섰다. 교육을 통해서 가난해지는 나라는 없다. 교육은 직원들의 능력을 키움으로써 사람이 경쟁력인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오뚜기' 같은 기업의 경우는 정기적으로 전사원이 교육을 받는데 심지어 식당 주방 아주머니도 받는다고 한다. 장기적이며 지속적으로 실시되는 교육은 사람을 발전시키고 이것이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중에 가장 바꾸기 힘든 것이 머리(인식, 생각)라고 한다. 손과 발은 익숙해지면 변하지만 생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행동과 말을 바꿔야 한다. 과거 일본이 한국의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단발령 시행하고 언어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행동과 말을 변화시키면 사고도 조금씩 변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계는 노후와 되지만 기술은 넓어지는 것이다. 조금 더 빠르게 기술을 늘려주고 그 기술의 사용 방법을 알려주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시 하는 것이 기업이 생존과 번영할 수 있는 빠른 방법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