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정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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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동네를 들고 다닌다. 놓치면 촤르륵 펼쳐지는 동네, 목욕탕 굴뚝이 바닥에 엎어지고 시인은 아버지의 등을 멀뚱히 쳐다본다. 핏빛의 포도송이가 짙게 뭉크러져 자그마한 웅덩이가 고인다. 묘묘, 아이는 첨벙, 슬픔의 색채로 털을 물들이며 굴뚝이 뿜어내는 뽀얀 수증기 속으로 달려든다. 혼자가 된다는 건 뭘까, 찢어진 페이지들, 그 위로 고요히 눈이 내린다. 기침하듯, 마른 불을 비춰주는 가로등 아래서 시인은 웅크리고 앉아 낱장의 종이 위로 녹아드는 눈송이 떼를 바라본다. “네가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가난은 떼를 쓰지 않는 아이,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는 아침, 시인은 무릎에 묻은 눈을 털고 서문으로 걸어간다. “눈구름 속에 구멍이 났는지 함박눈이 쏟아지는 오늘, 나는 엎어진 책을 주워들어 표지를 툭툭, 턴다. 죽은 십자매의 가슴 위로 핀 꽃, 슬몃, 귀에 가져다 대면 들리는, 약속도 없이 피어나는 사랑의 박동.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하는, 작은 소리를 읽는 내가 슬퍼지는 것은 애도일까.

 

정현우 시인의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를 기억한다. 추운 계절이었던 것 같다. 그 추웠던 계절은 한 바퀴를 돌아 녹색의 산문집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것은 걸친 외투를 달리했을 뿐 살결의 온도는 여전히 춥고 가난하고 슬프도록 느껴졌기 때문에 쓴 표현이다. 캄캄한 방, 조명은 형광등 대신 촛불로, 의자에 앉기보다 바닥에 웅크려 앉아 슬프고도 사랑이 담긴 문장들을 한 줄씩 읽어나가는 독자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연상,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면 더 좋을 것이다. 정현우 시인은 그렇게 글을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눈이 오지 않는 계절에는 책상 옆에 스노우볼을 두고 그 옛날, 아이였던 시인, 그 자신을 떠올리며, 책은 그렇게 써진 것이 아닐까. 시인은 독자들에게도 소복이 눈을 덮어주며 그렇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wj_booking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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