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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글쎄..아마 내 서평이 읽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9개나 서평이 올랐다는것은 별 다섯개보다 의미가 훨씬 큰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보게 된것은 고등학교를 유학을 하며 지내던 시절 어머니가 들르시며 갖고 오신 짐 속에서였다. 유학을 하며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소설은 거의 몇년 동안 읽지 못하였고 전공공부와 원서로만 씨름하고 있었다. 앞표지의 그림이 참으로 인상적이 었던 이 책을 펴는 순간,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임을 알았다. 나는 경건서적을 제외하고는 동화체 이야기나 대지와 같이 일상생활을 세세히 다룬 소설을 참 좋아한다. 이 책의 주인공이 세세히 묘사하는 그 마을 풍경과, 자신의 삶과 그리고 좀머 아저씨이야기에서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숲의 축축한 기운과 아저씨한테서 나는 것만같은 퀘퀘한 냄새를 느낄수 있었다. 기껏해야 2시간이면 읽은 이 동화같은 책에서 이런 많은 것들, 많은 느낌을 불러내는 것이 쏟아져 나온다는게 요술같은 일이었다. 어린 주인공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처럼 말이다.
이제 대학교 4학년. 거진 5년만에 펼쳐본 이책에서 나는 고등학교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 왜 좀머아저씨는 그렇게 끊임없이 걸어야 했을까?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는 아무도 상관치 말라고 소리쳐야 했을까? 왜 호수로 걸어들어가 그의 생을 거기서 끝내야 했을까...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극단적인 이타주의란 말을 들은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강한 부정을 긍정이란 말이 있듯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은 그 반대의 끝에서 찾아볼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는 너무나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너무나 무료하게 시간이 가고 있다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심지어 부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언제부터인가 끝임없이 걷는 것으로 아주 바빠질수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 늦게 까지.. 그가 중간에 짧은 휴식을 취했을때 (소년이 나무에서 떨어지려던 그 순간!) 그가 그렇게 괴로와 하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휴식은, 노동으로 오는 참된 보람의 휴식이 아닌 그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하던 무력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아무도 그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을까? 외로왔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잊어보려고 그는 걸었고 때로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도 '다시 잃어 버린다는 두려움-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되는 쪽을 선택했다.
이 책의 동화적인 어투에 비해 얼마나 철학적으로 해석될수 있는지 안다 (물론 그 철학적인것에 대해 논쟁할 실력은 없지만). 그러나 나는 사람과 그 심리를 아주 간단한 욕구에서 찾고 싶다. 첫째,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이란 느낌, 둘째, 자신이 사랑받고 보살펴지고 있다는 느낌. 결국 인간의 힘으로, 그것도 혼자의 힘으로 풀으려 평생을 버둥거렸던 좀머씨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은 우리의 doing이 아닌 우리의 being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있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결국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것,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 있다는 확신 아닐까.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우리가, 이렇게 방향도 없이 뛰고 있을까. 자신이 '무언가' 란 확신을 쫓아서 말이다. 이제 잠시 그루터기에 앉아 쉬어보자. 속도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잡아 그길에 주어진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즐기며 살아가는 멋진 여행이 우리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