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고 있는 중...책속에 소개되는 노래와 함께 쓰여진 구절들에 나른한 오후 잠시 멍하니 아득해진다.

「밤이 되면 듀크 엘링턴의 LP<서치 스위트 선더>에 들어있는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듣곤 했다. 나른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당시의 일들이 언제나 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리 행복한 시절이었다고는 할 수 없고, 나는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안고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보다 더 젊었고, 더 굶주려 있었고, 더 고독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온전한, 마치 잘 갈아진 칼날같은 나 자신이었다. 그 무렵에는 듣는 음악 한 음 한 음이, 읽는 책 한 줄 한 줄이 몸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은 송곳처럼 예리해서, 내 눈은 상대를 찌를 듯한 날카로운 빛을 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그 무렵의 나날과 거울에 비친 내 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터 서른살이 다 되어 우연히 유키코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 그 무렵 곧잘 시마모토를 생각했었다는 것. 너를 만나 단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 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 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 내 생각, 자주 했어?˝
˝그래.˝
˝나도 네 생각을 자주 했어˝라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언제나 힘들어 질때마다. 넌 나에게 있어 태어나서 이제까지, 유일한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어.....잘 자. 널 만나서 좋았어.˝
˝시마모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환상 같은 걸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 우두커니 선채로, 거리에 내리는 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열두 살 소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적, 나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비를 쳐다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보고 있으면, 내 몸이 조금씩 풀어져 현실 세계에서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아마도 빗속에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버리는 것 같은 특수한 힘이 있는 것이리라. 적어도 그 무렵의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가게에 돌아와 보니 시마모토가 앉았던 자리에 아직도 술잔과 재떨이가 남아 있었다. 재떨이 속에는 루주가 묻은 담배꽁초 몇 개비가 살며시 찌그러진 채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음악의 여운이 조금씩 멀어지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 부드러운 암흑 속에서는 아직도 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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