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생명의 뿌리를 깨우는 봄비가 종일 내리는 토요일, 보강 수업을 하며 틈틈히 요즘 계속 읽고 있는 장영희교수님의 수필집들에 빠져 든다. 교수님도 누가 쓴 것인지, 원전이 어디인지조차 알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글이라며 소개해주시는데 읽다가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필사를 해두기로 한다.

<가면>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천 개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들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무엇무엇하는 ‘척‘하는 것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죠. 만사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지요. 침착하고 당당한 멋쟁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지요. 그렇지만 내게 속지 마세요.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봐 겁이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당신께 말할수 있겠어요.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비웃을까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아마 죽고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게 밝혀지고 그로인해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할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함의 가면을 쓰고 필사적인 게임을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떠는 작은 아이입니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일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얘기하고 정말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안합니다. 하지만 그럴때, 내가 말하는 것에 속지마세요. 잘 듣고 내가 말하지 않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을 들어주세요.

그렇지만 나는 가면뒤에 숨어있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있는 게임이 싫습니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당신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만이 내가 쓰고있는 가면을 벗어 버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나를 격려해 줄 때, 정말로 나를 보듬어 안고 이해해 줄 때, 나는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내 속의 진짜 나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숨어 떨고있는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불안과 열등감, 불확신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아주세요!

그것은 당신께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두려움과 가치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회의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더욱 가까이 올수록 나는 더욱 더 저항해서 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납, 관용은 그 어느 벽보다 강합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그 벽들을 무너뜨려 주세요.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상처받기 쉽고 여리기 때문입니다. 내 가면을 벗기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장영희,<내 생에 단 한번>중에서_

오래전 잡지에서 읽고 복사해서 노트에 끼워두셨던 영어로 씌여진 글이라고 소개하시는데, 그렇게 마음에 두셨던 글이라니 새삼 누구나 다 겉보기랑은 다르게 여린 속사람이 존재하는가보다.

‘불운을 깨울까 무서워 발끝으로 살짝 걸으며 살아갔다.‘

항상 무엇인가 걱정하고 조바심하고, 주저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불확신에 차있는, 말한마디에도 상처받을 정도로 마음 여리고, 부끄럼 잘 타고 누가 무슨말을 하든 문자 그대로 믿는 순진함, 게다가 구제 불능의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감상주의자, 실수투성이.... 교수님 스스로 자기를 이렇게 설명하셨지만 마치 내 자신을 들킨 듯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녀의 글을 읽어나가며 그렇게 작고 나약한 인간임을 깨달았기에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것을 품고 사랑을, 삶을, 희망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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