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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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치와 이 여자에 공통되는, 나잇값 못하는 순진무구함에는 이제 슬슬 진력이 난다. 그저 악의가 없다는 걸 빌미로 타인의 영역이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에 함부로 저벅저벅 들어와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쪽에서 반격의 칼을 휘두르면, 상대는 그 칼을 받아낼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상처 입고는 피를 철철 흘린다.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나. 사치오는 한시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p.257

‘누가 뭐라고 비난하든 지금 자신에게는 이 확고한 연대가 있다. 그점이 무엇보다 큰 용기를 준다. 그것은 타인의 칭찬과 폄훼에만 신경쓰고 살아온 지난 몇십년 동안에는 얻을 수 없던 감각이었다. 지금 이대로 세상에서 잊혀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258

‘이전의 자신이라면 웃을 테지만, 웃고 싶으면 웃으면 될 일이다. 사치오의 몸 안에서 전에 없이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 지금까지 기누가사 사치오의 인생에서 딱 하나 껴 맞추지 못한 퍼즐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을 얻은 거지.‘p259

‘‘괜찮아, 신페이. 살아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거야. 허접한 생각, 입에 담을 수 없는 한심한 생각도. 그러나 생각했다고 해서 그게 다 현실이 되는 건 아니야. 우리는 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러 세상을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자신을 아끼는 사람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지. 깔보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는거야. 안 그러면 나처럼 돼. 나처럼 사랑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 되는 거라고. 쉽게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헤어지는 건 순간이야. 그렇지? 그러니까 소중한 것은 꽉 잡는거야. 너희들은 꼭.‘

‘심했죠. 너무 심했어요. 왜 우리는 소중한 것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지. 눈에 보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잡았던 손도 놓아버리고. 언제나 기회를 날려버리죠. 왜 이렇게 맨날 헛발을 디디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정말 끔찍합니다. 책을 읽어도 돈을 벌어도 전혀 현명해지지를 않으니. 언제까지 이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건지. 이제 넌더리가 납니다. 아주 넌더리가 나요. 정말이지 살아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요.‘ p284

‘아주 잠깐 엿본 당신의 그 문자메시지를, 지금도 종종 떠올려.
이제 사랑하지 않아. 털끝만큼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았는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는지, 당신과 헤어지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노력이 중요하겠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사람은 후회하는 생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p323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사람들은 깊게 상처입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삶의 의욕을 빼앗기고, 그 고통은 또 다른 죽음을 부르기도 하지.(...) 그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에게든 필요해.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두고두고 생각할수 있는 존재가.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 타자가 없는 곳에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생은 타자라고. 죽은 당신이 내게 ‘그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드는군. 이미 늦었나.‘ p325

‘사실 문제는 ‘이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넌더리 남‘을 위악으로 비켜가지 않고 똑바로 마주한 채 자각하고 또 견뎌내는 것이다. 그건 살아갈 기력마저 소진해야 할 만큼 힘겨운 자각이고 견뎌냄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한 인간을 맑게 곧추세우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자각과 견뎌냄을 기꺼이 수용하게 되었을 때, 남자는 울지않을까.p333(해설)

<아주 긴 변명>니시카와 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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